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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에게 보내는 편지

잘 지내셨습니까, 김선생님? 저는 대한민국에서 과학철학(科學哲學, philosophy of science)을 공부하고 있는 35살의 학생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겨우겨우’ 학생입니다. ‘겨우겨우’ 대학에 들어갔고요, ‘겨우겨우’ 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겨우겨우’ 석사 논문을 썼고, ‘겨우겨우’ 박사과정 수업 수강을 최근에야 마쳤습니다. 학부, 석사, 박사과정 학점 이수규정도 ‘겨우겨우’ 충족시켰습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이후 저는 제가 소속되어 있는 집단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학교에 소속되어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모범생이 아닌 우둔하고 평범한 학생일 뿐입니다. 우둔하고 평범한 학생이라도 스스로가 ..

일상 이야기 2016.10.08

어떤 현실인식

추석 연휴 때 부모님, 아내와 영화 [밀정]을 보고 난 후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는 1945년에 끝났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학문적으로도 독립을 한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아직까지 학문적으로 식민지 상태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물음이 시작된 이후 나는 일제 식민시대와 현재의 학문적 상황을 비교하면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학문적 식민지 혹은 학문적 후진국에서는 학문체계를 선진국으로부터 차용한다. 실제로 우리나라도 그렇다. 고등교육기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 우리나라의 많은 똑똑한 학생들은 학문적 선진국(미국, 영국 등)으로 유학을 떠나 학위를 받아온다. 학위를 받은 다음에는 대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우리나라의 대학에서 교수 직위를 얻은 후 독창적..

일상 이야기 2016.10.07

버지, [개인주의와 심적인 것] 요약 정리

버지(T. Burge),「개인주의와 심적인 것("Individualism and the Mental")」 다음과 같은 사고실험을 생각해보자. 관절염에 시달리고 있는 한 사람 A가 있다. A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명제 태도들을 갖고 있다. ‘나는 몇 년 동안 관절염에 시달리고 있다’, ‘손목과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관절염의 통증이 발목에서 느껴지는 관절염의 통증보다 더 심각하다’, ‘관절염에 시달리는 것이 간암에 걸린 것 보다는 낫다’ 등등. 위와 같은 명제 태도들은 ‘옳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A가 ‘그릇된 것’으로 여겨지는 다음과 같은 명제 태도를 갖는다고 생각해보자. ‘요즘은 허벅지도 쑤시는데, 혹시 관절염 증세가 허벅지에까지 옮겨간 것이 아닐까?’ 만약 A가 자신의 이러한 추측에 대해서 의사 D에게 ..

퍼트남, ["의미"의 의미] 요약 정리

힐러리 퍼트남(Hilary Putnam),「“의미”의 의미(The Meaning of "Meaning")」 우리가 사용하는 자연언어의 의미를 따지는 문제는 중요한 언어철학적 문제이다. 퍼트남은 언어에 있어서도 ‘문장’의 의미를 따지기보다는 ‘단어’의 의미를 따지려고 한다. ‘토끼’, ‘물’, ‘금’과 같은 단어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단어의 의미는 다름아닌 그 단어의 ‘외연’이라고 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답은 유지되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어떤 대상이 그 단어가 말하는 부류에 포함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경계 사례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만약 “심장을 가진 존재”와 “신장을 가진 존재”의 외연이 같다고 해도 그 두 표현의 “의미”가 같다고 말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

데이빗슨, [A Nice Derangement of Epitaphs] 요약 정리

도널드 데이빗슨(Donald Davidson),「A Nice Derangement of Epitaphs」 우리는 일상 속에서 종종 언어적 유희들을 경험하는데, 이러한 언어적 유희들 속에 등장하는 단어들의 뜻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단어들의 뜻과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다양한 언어적 유희의 상황 속에서 의사소통을 하는데 거의 어려움을 겪지 않는데(물론 사람들마다 이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데이빗슨은 이러한 상황을 주목하고 이러한 상황에 대한 적합한 언어철학적 설명을 제공하려고 한다. 이렇듯 맥락에 따라서 문자 그대로의 뜻이 변경되어 해석되는 경우가 많은데, 데이빗슨은 특정한 발화의 맥락에서 말해진 단어들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 그는 ‘화자의 의미’와 ‘..

김재권, [심적 인과에 관한 여러 문제들] 요약 정리

김재권(Jaegwon Kim),「심적 인과에 관한 여러 문제들」 심적인 것이 물리적 세계에서 어떻게 인과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내는 것은 심리철학에서의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마음이 근본적으로 물리적인 세계에 그것의 인과적 힘을 적용하는 것이 가능한가? 심적 인과에 관한 세 가지 문제들이 있다. 첫째는 무법칙적인 심적 속성들의 문제이다. 어떻게 무법칙적인 속성들이 인과적 속성들이 될 수 있는가? 둘째는 외부적인 심적 속성들의 문제이다. 계산주의로부터 비롯된 구문주의에 따르면, 심리적 상태들의 구성적 속성들인 지향적 속성들은 인과적으로 무관한 속성들이다. 심적 상태들의 표상적 내용이 아니라 구문론적 형태가 인과적으로 유관하다는 것이다. 이는 의미론적 속성들을 관..

데이빗슨, [심리적 사건들] 요약 정리

데이빗슨(Davidson),「심리적 사건들(Mental Events)」 심리적 사건들은 물리적 이론의 법칙적 연결망 속에 포착되지 않는다. 심리적 사건들은 물리적 사건들에 인과적으로 의존적인 반면, 물리적 법칙들에 따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한 데이빗슨은,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려 한다. 칸트가 시도했던 것과 유사하게, 자유와 자연적 필연성 사이에는 모순이 없음을 보이려 하는 것이다. 심리적 사건들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원리들이 있다. 첫째, 적어도 몇몇의 심리적 사건들은 물리적 사건들과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인과성이 있는 곳에는 법칙도 있다(인과성의 법칙적 성격). 셋째, 심리적 사건들이 예측되거나 설명될 수 있는 기초가 되는 엄격한 결정론적 법칙은 없..

상대성이론의 공리체계적 분석: 그 의의와 한계

상대성이론의 공리체계적 분석: 그 의의와 한계 라이헨바흐의『상대성이론의 공리화』를 중심으로 1. 여는 말: ‘과학적 지식의 분석’의 방법론 논리경험주의를 이끌었던 주요 철학자들 중 한 명인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1891-1953)는 1920년에 저서『상대성이론과 선험적 인식(Theory of Relativity and A Priori Knowledge)』을 출판한다. 아인슈타인에게 바쳐진 이 책의 주요 요지는, 임마누엘 칸트가 18세기 후반에 제시한 ‘순수이성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인식론이 20세기에 이르러 등장한 물리학 이론인 상대성이론의 기초가 되는 인식론으로서는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칸트는 수학이나 물리학적 진술들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객관적인 확실성을 갖고 있는 판단..

한스요한 글로크, [분석철학이란 무엇인가] 독서노트

한스요한 글로크 지음, 한상기 옮김, 『분석철학이란 무엇인가?』(2009, 서광사) Hans Johann Glock, What is Analytic Philosophy?, 200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역자의 요약 “...현 상태의 분석철학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지은이는 분석철학의 역사적 기원과 뿌리를 검토하고, 그동안 분석철학의 전형적 특징으로 거론되었던 것들이 분석철학을 정의하는 특성이 될 수 없음을 밝힌다. 분석철학이 대륙철학에 비해 지리-언어적으로 영어권 국가에서 진행된 철학이라는 주장, 대륙철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를 무시하거나 경시한다는 주장,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나 언어적 전회 등을 중심으로 한 특정 신조를 고집하거나 실천철학을..

평범하고 단조롭고 낙천적인

토요일 밤이다. 아내는 먼저 잠들었다. 나는 케이블TV의 음악채널에서 나오는 재즈를 듣다가, 문득 무엇이라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아내와 함께 여성병원에 다녀왔다. 아내의 뱃속에 있는 우리 아이는 순탄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병원진료가 끝난 후 아내와 나는 달성도서관에 가서 2주 전에 아내가 빌렸던 책을 반납하고 아내가 보고 싶어 하는 책을 새로 빌렸다. 우리는 책을 빌린 다음 도서관 열람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는데, 아내는 새로 빌린 책을 읽었고 나는 논문자격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분석철학에 관한 책인 [분석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점심때가 되자 우리는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음식점에 가서 파스타, 피자, 목살볶음밥을 배불리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올해 추석..

일상 이야기 2016.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