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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0002

어제는 성탄절이었다. 성탄절이었지만 나는 대구 현풍에 있는 한 독서실에서 기말 과제를 작성했다. 박사학위를 끝낼 때까지는 아마도 이런 식의 삶이 이어지리라. 사실 나는 이런 삶을 원하지 않았는가? 세상의 움직임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삶을. 능력이 출중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나는 철학을 공부하는 철학도이다. 비록 나는 별도의 직업을 가지고 있고 이 직업을 통해 이 세상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하고 있지만, 이 땅의 철학이 유지되고 발전되는 데에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것 역시도 내게는 일종의 운명이자 사명이다. 방금 막 이번 학기 마지막 과제 제출을 끝냈다. 시원섭섭하다. 아마 한동안 주말에는 글을 읽는 일 이외의 다른 일들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현재 내게 가장 절실하게 필..

일상 이야기 2014.12.26

부모님의 아들

부모님의 아들 주기적으로 거울을 보면 나는 내가 누구고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지 않고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지각들과 내 생각의 흐름에만 관심을 집중하면, 세상은 내게 경이롭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생각이 아득해지기 전에 나는 다시 거울 속의 내 얼굴을 확인하고, 내 삶의 의미를 확인한다. 언어와 의미가 세계 속에 부유하던 내 삶을 안정시킨다. 이번 추석 명절에는 아내인 은혜와 함께 부모님이 계신 부산에 내려가서 차례를 지내고, 성주의 효 요양병원으로 찾아가 할머니를 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올해 아흔 세 살이시다. 할아버지는 1921년 생이셨고, 나의 아버지는 1953년에 태어나셨다. 나는 1982년..

일상 이야기 2014.09.10

서양근현대철학 입문(02)

2. 철학과 근대세계 신은 존재하는가?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 특히 악의 존재함과 양립가능한가? 역사는 발전하는가 아니면 무질서하거나 순환하는가? 모든 실재는 물리학에 대한 연구로 환원가능한가? 이 모든 물음들은 근대세계라는 독특한 조건 아래에서 제기되었다. 어원학적으로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철학’이라는 개념은 다양한 방법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 중 하나의 방법은, 철학을 가장 일반적인 또는 포괄적인 유형의 탐구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다른 종류의 과학들이 그 과학들 고유의 방법론을 통해 개별자들을 탐구하는 것과는 구분된다. 이른바 ‘제1철학’은 지식에 대한 이론인 ‘인식론’과, 실재에 대한 이론인 ‘형이상학’이라는 두 세부 분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강의의 핵심을 이..

노트 0001

논문 제목 논리경험주의의 자연철학 연구 - 한스 라이헨바흐의 자연철학을 중심으로 뉴턴 이후의 물리과학과 자연철학 사이의 관계. 특히 흄의 철학과, 이에 대응한 칸트의 자연철학. 칸트의 자연철학은 18, 19세기의 자연철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러나 19세기의 자연철학에 대해서 상세하게 다룰 수는 없다. 이야기는 19세기 말, 논리경험주의들이 경험했던 19세기 자연철학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특히 독일의 젊은 철학자들은 어떤 사상에 직면하고 있었는가. 19세기의 자연철학자들에게 왜 그렇게 칸트의 철학이 중요했는가. 아마도 칸트의 철학이 인간의 경험이 납득할 만한 수준에서 뉴턴 물리학을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후에 덧붙여지는 인위적인 정당화는 아니었다. 아무리 물리과학..

일상 이야기 2014.08.27

서양근현대철학 입문(01)

1. 머리말 나는 나의 책상이 단단하다고 경험한다. 하지만 물리학에 따르면 책상은 대부분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의 경험과 물리학이 동시에 옳을 수 있는가? 세계에 대한 과학적 관점이 인간의 경험과 양립가능한가? 좀 더 어려운 질문을 던져보자. 세계에 대한 과학적 관점이 인간의 자유의지, 도덕적 책임, 종교와 양립가능한가? 물리적 세계에서 마음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실재의 궁극적인 본성은 무엇이며, 실재에 대한 인간 지식의 한계는 무엇인가? 이 강의에서 우리는 17세기부터 시작해서 20세기까지 이어지는, 실재와 지식에 대한 서양근현대철학의 사상(형이상학과 인식론)을 훑어볼 것이다. 이 시기의 철학 사조는 경험주의, 합리주의, 관념주의, 언어철학, 논리실증주의, 실존주의, 현상학, 포스트모더니..

평균의 위안

평균의 위안 사람이 모든 일을 잘 할 필요는 없다. 꼭 필요한 일들은 살아가면서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할 수 있으면 된다. 경쟁심에 사로잡혀 잘 할 필요가 없는 일을 잘 하려고 하다보면 불필요한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러한 불필요한 소모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믿는 긍정적인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내가 잘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내가 도울 수 있다는 마음자세다. 아주 우연한 이유로 나는 초등학교 때 체육을 잘했고 공부도 잘했다. 나는 상대적으로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성장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키가 큰 편이었고, 큰 덩치 덕분에 달리기나 피구 같은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신체적 성장 상태가 자연스럽게 공부하는..

일상 이야기 2014.08.24

과학철학에서 자연철학으로

과학철학에서 자연철학으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생존을 위한 임무와 노동을 피할 수 없다. 내가 학교라는 조직에 속해 있을 때 나는 학교에서 내게 요구하는 임무인 공부를 수행했다. 군대에서 나는 통신소대장과 본부중대장이라는 내게 주어진 직책에 맞게 업무를 수행했다. 대학원에서는 수업에 참여하고 보고서를 제출했고 학위논문을 제출했다. 취업을 한 이후에는 내게 주어진 업무인 ‘한국 대학생 지식멘토링’ 사업을 지금까지 수행하고 있다. 나는 내가 나의 임무와 노동을 통해 사회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나는 노동자다. 나는 대학원 박사과정 1학기를 마치고 휴학하여 취직을 했다. 위기에 빠진 나의 가정을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내 모든 것을 걸고 필사적으로 취직 준비를 했다. 취직을..

일상 이야기 2014.08.23

2014년 여름휴가

2014년 5월 31일에 나는 은혜와 결혼을 했다. 혼인신고는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6월 11일에 했다. 결혼을 하고 처음 맞는 여름휴가였다. 처음에는 우리 둘이서 여름휴가 일정을 맞추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은혜의 선임이 나의 휴가와 같은 시기에 휴가를 쓰는 바람에 은혜는 휴가를 쓰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출장 때문에 원래 계획했던 휴가를 그 다음 주로 미루게 되고, 은혜 역시 그 다음 주에 2일을 쉴 수 있게 되면서 서로의 일정이 들어맞았다. 나는 8월 1일 금요일에 경상남도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대구역에서 은혜를 만나 서울로 올라왔다. 우리의 2014년 여름휴가는 8월 2일 토요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뒤늦게 서로의 휴가 일정이 들어맞았기 때문에 우리..

일상 이야기 2014.08.10

예술의 기능

예술의 기능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이, 더욱이 나이 어린 여성들보다는 나이 많은 여성들이 아주 잘 아는 사실이 있다. 세상과 삶이란,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멋지고 그럴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머리 싸매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젊은이들의 가슴을 울리는 사랑이라는 것도, 명예라는 것도, 신념과 의지라는 것도 다 세상을 많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서 우러나는 법, 시간이 지나면 삶이라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단조롭고 덜 정의로운 것이며 그저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네들은 젊은이들의 사랑을, 그 정열을 그 누구보다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많은 진정한 것들은 그런 환상과 열정 속에서 새롭게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일상 이야기 2014.08.07

문화적 전통에 편입하기

예전에 나의 아버지께서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시면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드시며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너도 나이가 들면 트로트가 좋아지게 될 거다.” 하지만 아버지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나는 30대인 지금도 여전히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즐겨듣던 김현철과 이소라, 조규찬의 노래를 좋아하고, 대학 시절 자주 듣던 넬이나 클래지콰이, 이한철의 노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민중가요나 김광석의 노래는 나보다 전 세대의 선배들이 즐겨 듣고 불렀다. 오히려 나에게는 영국 그룹 라디오헤드의 크립(Creep)이 들려줬던 우울하고 몽환적인 가락이 익숙하다. 나의 경우 오래 전부터 익숙해진 음악적 감수성을 바꾸기는 힘들었다. 물론 나는 대학 입학 후 주변에서 음악적 감수성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일상 이야기 2014.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