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152

일관된 연구의 필요성

이제는 생성형 인공지능의 적절한 사용이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인공지능을 사용할수록 인간에게는 더욱더 일관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특정 분야에 대한 확고한 전문적 식견이 없다면 그 분야에 관련된 언어적 게임에서 인공지능을 이길 가능성이 상당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인공지능은 오히려 좀 더 전통적인 인간의 수련 방식을 강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어떤 일을 할 때 아주 깊게 해야만 인공지능을 이길 수 있다. 물론 계산의 영역, 단순한 규칙에 기초한 게임의 영역에서는 더 이상 인간이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은 매우 전통적인 철학적 탐구 주제다. 이 주제를 가지고 평생 연구를 해도 충분할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세기 이후 발전한 자연과학을 기초..

철학의 전장, 혹은 전장의 사유

철학을 하는 사람은 전장에 있는 사람이다. 전사로서의 철학자. 나는 소크라테스를 생각할 때마다 강인하고 두려움 없는 군인을 떠올린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여러 전투를 치러내며 죽음의 위기를 이겨낸 훌륭한 군인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이기도 하고 좋은 군인이기도 했던’ 것일까? 오히려 그는 좋은 군인이었기 ‘때문에’ 철학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오늘날 존재하는 대학, 연구소 혹은 다른 겉보기에 평화적인 기관과 제도는, 철학자에게는 끊임없이 치러나가는 일련의 전투 속 일시적인 휴식처일 뿐이다. 그 허상을 즐기되 스스로 속아 넘어가지는 않는다. 너무 당연하게도, 철학자가 굳이 전사로 살아갈 이유는 없다. 예를 들어 그는 이미 일어났던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으로 살아가도 된다..

발표 준비의 즐거움

작년에 대구에서 열린 철학 학술 발표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한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교수님께서도 과학철학에 큰 관심을 보이고 계신 것 같았다. 그날 이후 교수님께서는 나에게 연락을 주셔서, 고려대 철학과에서 2025년 1학기에 철학과-물리학과가 서로 협업하여 수업을 개설할 계획인데, 그때 혹시 공간과 시간에 관한 특강을 각각 1회씩 해줄 수 있겠느냐고 제안하셨다. 당연히 나로서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그 제안에 응했다.    막대와 시계의 물리학.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을 이렇게 간단히 정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 유형의 기원을 찾던 중 나는 리만과 헬름홀츠의 논문 원전을 읽게 되었..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일

읽는 것은 편하다. 내가 어떤 글을 읽는다고 하면, 그 글은 대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쓴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는 데 1분이 걸렸다고 할 때, 아마도 그 글을 쓴 사람은 1시간 이상을 공들여 글을 썼을 것이다. 여기서 노동의 차이 혹은 비대칭성이 발생한다. 많은 경우 글 읽는 사람은 글 쓴 사람의 노동 성과를 즐긴다. 그래서 글을 읽는 일은 글을 쓰는 일보다 편하고, 더 익숙해지기 쉽다.    비슷한 논리가 듣는 것에도 적용된다. 말하는 것보다는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게 훨씬 더 편하다. 듣는 사람이 재미있도록 말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동과 준비가 필요하다. 1시간 재밌게 말하기 위해 3시간 이상 준비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듣는 것을 위해서는 거의 별다른 준비가 필요하지 ..

2025년의 연구 주제

나는 기준을 높게 잡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말해, 나보다 훨씬 더 잘하는 사람들을 비교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은 전쟁터이고, 인생은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이다. 일시적인 평화와 잠정적인 동료는 일련의 싸움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경우, 고집을 피우며 끝까지 저항하다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를 입어서는 안 된다. 화해하려고 시도하거나, 그게 안 되면 도망을 쳐서 살길을 찾고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나는 기준을 높게 잡지 않기 때문에 나의 능력으로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연구도 그러하다. 내가 세계적인 수준의 뛰어난 철학자가 아닌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철학 연구에는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건 당연한..

과학을 살펴보는 고고학적 태도

돌이켜보면, 나는 정규 과정에서 과학을 배울 때 군인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느꼈다. K-2 소총에 대해서 배울 경우, 훈련병은 이 소총의 제원과 기능에 대해서 학습하지만, 이 모든 학습은 결국 소총을 잘 쏘기 위한 것이다. 소총을 잘 쏘기 위해서 많은 연습 사격을 시행한다. 100명의 훈련병은 20발 중 20발을 맞추는 사람, 20발 중 12발을 맞추는 사람 등으로 분류된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연습 사격을 하고, 그렇게 훈련을 받은 이후 훈련병들은 정식 군사로서 실전에 투입된다. 결국 훈련의 목표는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전투 병력을 양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훈련병은 기계가 아니다. 훈련병은 왜 내가 이 훈련을 받아야 하는지, 지금 내가 참여하고자 하는 전쟁은 왜 ..

치열한 경쟁 속, 마음의 평정

내가 어린아이였던 시절, 나는 우연히 체스 게임을 알게 되었고 이윽고 이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게임을 몇 번 하다 보니 금방 알게 된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상에 나보다 체스를 잘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었다. 게임에서 지면 속이 무척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내가 평범한 체스 게이머임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에서 기를 쓰고 애써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내 머리가 그리 좋지는 않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그러자 나는 뛰어남보다는 성실함에 더 무게를 두는 방식으로 삶의 전략을 조정했다. 승패에는 크게 연연해하지 않고, 그저 성실하게 내 일을 하겠다는 거였다. 이런 전략은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천천히 나의 길을 걸어간다

우리 집안에서 대학교수가 된 사례는 내가 처음이다. 그렇다고 나는 내가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교수가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노력했고, 무엇보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나의 아이들 역시 나처럼 공부하는 것을 좋아할까? 나는 이를 크게 바라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제각각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 있으며, 아이들은 그저 자신들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 된다. 굳이 그 일이 공부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서울대학교와 같이 국내에서 매우 유명한 대학의 과학철학 교수였다면 나는 나의 역할에 대해 큰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부담 없이 자유롭게 내가 지금까지 추구해 온 과학철학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다. 백종현 교수님이 칸트 철학 연구의 화신이었다면..

학문적 선배들을 따라서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나는 실로 이 말에 공감하는데, 왜냐하면 나는 전문적인 학자가 되기 전까지 다른 일들을 하면서 ‘하는 일’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엇인가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것을 본업으로 삼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그것에 대해 애호가로 남게 된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에 대해 영원한 애호가로 남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 일을 해야 한다.    내가 따르는 학문적 전통은 두 갈래다. 하나는 철학의 전통이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아직도 나는 철학과에 소속되어 백종현, 김상환, 김기현, 강상진, 조인래 교수님의 강의를 수강했던..

과학철학 연구의 즐거움

한동안 정치적인 문제들에 신경을 쓰다가, 이제는 나의 본업이자 생업인 과학철학 연구에 집중하려고 한다. 나는 올해 3월에 대학교수로 정식 부임하기 전까지 직장 생활과 과학철학 교육 및 연구를 병행해 왔다. 올 한 해를 전체적으로 돌이켜보면 지난 1년은 나에게는 대학교수라는 삶에 적응하는 기간이었던 것 같다. 대학교수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계속 국립대구과학관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과학관 인근에 있는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강의하며 지냈을 것이다.    과학철학 연구는 나의 적성에 맞고 재미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과학철학이라는 세부 분과가 철학의 영역에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있긴 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철학과에는 과학철학을 전공한 교수님이 계시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