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140

과학철학자의 길

고등학교 2학년 여름,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왜 학교에서 나가야 하냐고 말하던 한 고등학교 친구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친구가 볼 때 나는 참으로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고 늘 그에 관한 책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나에게서는 내가 과학을 정말로 좋아한다는 티가 났다. 단지 나는 문제집을 기계적으로 계속 풀기를 거부했을 뿐, 과학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좋아했다. 그렇게 과학을 좋아했던 나는, 다만 주입식 과학 교육을 받으며 문제를 잘 푸는 머리 똑똑한 학생이 되기를 거부했을 뿐이다.    아직도 나는 2000년에 검정고시 고사장에서 시험을 치렀을 때의 풍경을 기억한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특히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나와 함께 시험을 치렀다. 그때 나는 지금까..

철학을 권함

돌이켜 보면 나의 삶은 늘 주관이 뚜렷한 삶이었다. 부산과학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는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와 같은 철학적인 글을 읽으며 철학에 눈을 떴다. 수학자 하워드 이브스가 쓴 책인 [수학의 기초와 기본 개념]은 기본적으로 수리철학에 관한 책이었다. 국어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러셀이 쓴 [철학의 문제들]을 읽고 요약하라고 하셨고, 이를 계기로 러셀의 책을 읽은 나는 철학에 관해 가졌던 관심을 심화시켰다. 그런데 한국의 제도에서는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이과(理科)가 아닌 문과(文科)로 옮겨야 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이 되자 수학과 과학(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의 기본적인 학습이 끝났다. 그때가 되니 과학고등학교가 아닌 다른 인문계 고등학교로 굳이 전학을 간다고 해..

연구년에 관한 생각

지난 학기는 대학교수로서의 첫 번째 학기라 비교적 바쁘고 정신없이 보냈는데, 이번 학기는 그나마 좀 차분하게 지내고 있는 듯하다. 특히나 이번 학기에는 철학 과목을 2개 강의하고 있어 나 자신의 정체성을 다소 찾은 느낌이 든다. 어떤 수업이든 처음 할 때는 힘이 든다. 수업 자료를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번 수업 자료를 만들면, 다음에 수업할 때는 기존의 수업 자료를 수정하면 되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절약한 시간에 다른 책과 논문을 읽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읽고 생각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수업 교재의 생각이 아닌 나만의 생각이 형성될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 철학”이라는 수업을 하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수업을 하는 첫 번째 학기에는 시중..

과학을 성찰하는 시간

나는 종종 내가 왜 과학철학을 하게 되었는지를 잊지 않으려 애쓴다. 학생 시절 나는 수학과 물리학이 좋았는데, 왜냐하면 수학을 언어로 삼은 물리학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믿을 만한 설명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서 혹은 학원에서 수학과 물리학의 문제를 푸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고, 이와 관련한 더 풍부한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찾은 것이 수학사, 물리학사에 관한 책이었다. 그렇게 역사를 읽다 보니 사상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부터 ‘철학’이라는 학문에 입문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과학철학’이라는 전문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어버렸다. ‘과학철학’이라는 철학의 한 분야가 있고, 이 분야에 관련한 교과서적인 책들 또..

교수로서의 삶에 조금씩 적응함

만약 내가 국립목포대학교의 교수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국립대구과학관에서 선임연구원으로서 사회적 활동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올해 3월부터 대학교수가 되면서 새로운 종류의 삶을 시작했고, 어느덧 두 번째 학기를 진행하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비교적 합리적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내가 대학교수가 된 것 역시도 비교적 합리적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나의 역량에 적합한 자리에 오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는 내가 철학과가 아닌 교양학부에서 가르치게 된 것, 국내에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국립대학교인 국립목포대학교에서 일하게 된 것에 감사한다. 내가 목포대학교에 부임한 이상, 목포대학교의 교양교육 운영과 과학철학 교육을 위해 긍정적으로 공헌하는 것이 ..

돌이킬 수 없는 현재의 연속

나는 2024년 2학기에 총 6개의 수업 중 ‘철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수업을 2개 진행한다. ‘과학철학의 이해’, ‘현대철학’이 그것이다. 감개무량한 일이다. 20년 전 나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으로 공부하는 평범한 한 명의 학생일 뿐이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대학에서 철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그 20년 동안 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모든 게 명확하지 않았고 불안했던 나의 대학 시절을 떠올려 본다. 그 시절에 비한다면 지금의 나의 형편은 훨씬 나아진 편이리라. 나는 그에 대해 감사 또 감사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얻은 하나의 결론이 있다. 나의 삶은 오직 나만의 삶인 것이지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니며, 현재 내가 경험하는 이 순간은 지나고 나면 결코 다시 ..

인문학 연구자의 생존력

비록 나는 최종적으로 우리나라의 국립대학교 교수라는 좋은 직장을 얻게 되었지만, 내가 겪었던 인문학 전공자로서의 어려움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대학 시절, 내 주변에 인문학을 전공하던 사람들은 취직 걱정을 참으로 많이 했다.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서울대학교의 인문학 전공자라서 더 걱정스럽기도 했다. 왜냐하면 너무 고학력인 사람이 인문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채용하는 관점에서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석사를 끝내고 박사 과정을 휴학한 후 취직을 준비할 때는 상황이 더 안 좋았다. 육군 장교로 군 복무를 한 데다가 석사까지 마쳤으니 다른 취업준비생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석사 과정에서 공부한 과학사 및 과학철학은 (이 분야로 직장을 잡지 않는 이상) 취업 시장에서는 거의..

소소한 삶의 목표

나는 오래 전부터 과학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마 대학 시절 나를 조금이라도 알았던 사람이라면 이러한 점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공식적인 학점이 좋지 않았고 그야말로 ‘A+ 모범생’은 아니었다. 그 시절 나 자신조차도 내가 과학철학을 아주 좋아하지만 부족한 나의 능력으로는 교수까지 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나는 우리나라 국립대학교의 교수가 된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과분한 행운에 너무나 감사할 뿐이다.    나는 이제 과학철학 연구자로서의 내 운명이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고 믿는다. 나는 2012년 1월부터 2024년 2월까지 12년 1개월 동안 직장 생활을 했다. 나로서는 자랑스러운 공직 경험이었지만 그 기간은 그만큼 쓰라린 시..

철학자로서 산다는 것

우리 사회의 대학에서 철학과가 조금씩 없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철학과의 폐과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제법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보는 두 가지의 시각이 있다. 첫째, 이제 철학은 우리 사회 속에서의 쓸모를 다했으므로 궁극적으로 철학이라는 학문은 사라질 것이다. 둘째, 여전히 철학은 우리 사회 속에서 그 쓸모를 가지고 있지만, 그 쓸모의 비중이나 중요성이 줄어들고 있을 뿐이므로 계속 존속할 것이다. 물론 이런 두 가지 시각 이외의 다른 시각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편의상 이러한 두 가지의 시각만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겠다. 그리고 나는 이때 두 번째 관점을 취한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 사회에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필요하며, 그렇기에 나는 ‘철학’과 ‘철학과’가 계속 유지되리라 생각한다...

아인슈타인 담론에 관한 생각

다음 주에 예정된 한국과학교육학회 하계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나는 아인슈타인과 그의 과학철학에 관한 발표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어, 오래간만에 다시 아인슈타인의 몇몇 전기들과 그의 이론에 관한 논문들을 읽고 있다. 이렇게 다시 아인슈타인을 생각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일종의 행복이다. 돌아보면 처음 아인슈타인을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것이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이다. 김종오 선생이 번역한 [상대성이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출판사에서 나온 아인슈타인의 에세이집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임경순 선생의 [100년만에 다시 찾는 아인슈타인], 김용준 선생이 번역한 [부분과 전체] 중 하이젠베르크가 아인슈타인과 대화하는 장면.    그렇게 고등학생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아인슈타인이 쓴 글과 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