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린아이였던 시절, 나는 우연히 체스 게임을 알게 되었고 이윽고 이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게임을 몇 번 하다 보니 금방 알게 된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상에 나보다 체스를 잘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었다. 게임에서 지면 속이 무척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내가 평범한 체스 게이머임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에서 기를 쓰고 애써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내 머리가 그리 좋지는 않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그러자 나는 뛰어남보다는 성실함에 더 무게를 두는 방식으로 삶의 전략을 조정했다. 승패에는 크게 연연해하지 않고, 그저 성실하게 내 일을 하겠다는 거였다. 이런 전략은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입시제도에서는 꾸준하고 성실하게 공부한 학생이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공부하면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더라도 기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시험에 꼭 필요한 내용을 반복해서 학습했다. 키가 크지 않고 얼굴이 잘생기지도 않았고 성격이 사교적이지도 못했던 나는, 유일하게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인 공부를 무기로 삼아 무식하고 우직하게 계속 공부에 파고들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종종 내가 참 ‘일관된다’라는 평가를 한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단 한 사람의 철학자를 연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내 관점에서는 하나의 중요한 전략이었다. 남들이 제대로 주목하지 않은 훌륭한 철학자 한 명을 골라서 계속 파고들어야 나만의 독창적인 입장이 발전될 수 있으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전략은 실패하지 않았다. 나는 한 명의 철학자를 연구해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모두 취득했다. 이것은 혹독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 스스로 나에 맞는 전략을 필사적으로 채택한 결과였다.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나의 전략을 공개할 수 있게 되었다. 국립대의 정년트랙 교수가 된 이상 나만의 생존 전략을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을 연구하는 것을 말릴 때, 나는 그냥 웃으면서 그 말들을 흘려보내고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추구했다. 그것은 한갓 이상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추구가 나의 성향에 맞고 나의 개인적인 단점을 보완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 누구나 이기기 위해서 게임에 참여한다. 지려고 게임을 하는 사람은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나도 나의 부족한 재능과 자질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기기 위해, 역전하기 위해, 역습하기 위해 나름의 전략을 썼다. 주변에서 말릴수록 오히려 더 소신있고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채택한 전략이었다.
나는 삼국지 게임을 좋아한다. 나의 플레이 스타일을 보면 결코 삼국통일을 위해 무리하여 확장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평소에는 내정에 충실하며 군사력을 기르고, 전쟁할 때도 주로 수비를 하지 공격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격할 때는 수비할 때 비해서 군사력 상실이 배 이상 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군사력이 충분하고 장비가 강력해서 충분히 적을 압도할 수 있는 경우에만 전투를 벌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형적인 수비형 플레이어다. 나는 지금껏 게임에서의 플레이와 비슷하게 인생을 살아왔다. 내가 처한 상황에서 안정적인 전략을 취하되, 꼭 승부를 걸어야 할 때는 필사적으로 승부에 임했다.
앞으로도 나는 매우 안전하고 안정된 전략을 취하려 한다. 계속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을 연구하겠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보았을 때는 “또 그거냐? 그거 이제 좀 그만하면 안 되겠냐?”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이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룰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나와 함께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을 연구할 다른 연구자들도 진심으로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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