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준을 높게 잡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말해, 나보다 훨씬 더 잘하는 사람들을 비교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은 전쟁터이고, 인생은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이다. 일시적인 평화와 잠정적인 동료는 일련의 싸움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경우, 고집을 피우며 끝까지 저항하다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를 입어서는 안 된다. 화해하려고 시도하거나, 그게 안 되면 도망을 쳐서 살길을 찾고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나는 기준을 높게 잡지 않기 때문에 나의 능력으로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연구도 그러하다. 내가 세계적인 수준의 뛰어난 철학자가 아닌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철학 연구에는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건 당연한 일 아닌가?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 하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진다. 나는 이런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님을 다시금 새긴다. 모든 일은 내 수준에 맞게 해야 한다. TV를 많이 보다 보면 키 크고 잘생긴 사람이 사람의 표준이라고 착각하게 되고, 그러다 전신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 실망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을 바꿔야 한다. 오히려 기준을 키가 크지 않고 잘생기지 못한 나 자신으로 잡는 게 좋다.
올해인 2025년에 나는 대략 4가지의 연구 주제를 잡았다. (1) 기하학의 기초에 관한 리만과 헬름홀츠의 관점 비교 연구. (2) 떨어지는 상자에서 회전하는 원판으로 : 아인슈타인은 왜 리만 기하학을 수용했는가. (3) 시간과 인과성의 거시통계적 특징 : 분기 구조의 가설을 중심으로. (4) 라이헨바흐의 확률적 실재론 : 어떤 의미에서 실용적 실재론(파이글, 카르납)과 다른가. 연구 주제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잡았다. 구체적으로 주제를 잡아야만 이를 토대로 연구 논문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4가지 연구 주제를 적절히 배분한다. 예를 들어, (1)번 주제는 기본 연구 주제로, (2)번 주제는 교내 연구 주제로, (3)번 주제는 연구재단 신청 사업 주제로, (4)번 주제는 신진교수 정착지원 사업 주제로 삼는다.
또한 내가 거듭 되새기는 점은, 이런 연구 주제에 대해서 내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뛰어난 연구를 하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내가 읽는 논문들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뛰어난 논문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검색을 할 수 있겠지. 그런데 나 역시 그런 뛰어난 논문을 쓰려고 과한 욕심을 부리지는 않는다. 그냥 나는 내 수준에 맞는 논문을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여기서 나는 선택의 문제를 맞닥뜨린다. 좀 더 나의 실력을 올리고 시간을 들여서 더 좋은 논문을 쓸 것인가, 아니면 시간을 절약하는 대신 이전보다 약간 상승한 수준의(아니면 비슷한 수준의) 논문을 쓸 것인가. 나는 후자의 선택지를 선택한다.
이건 일종의 실용적인 태도와 선택인데, 이를 나는 주로 상인이셨던 나의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이미 누군가가 도시 중심의 판권을 장악하고 있고 나의 실력이 약하다면, 그 사람과 정면 대결하기보다는 좀 더 품을 팔아 도시 외곽을 돌아다니면서 제 살길을 찾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강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나 스스로가 강한 사람이 될 수 없다면, 강하지 않은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을 열심히 찾아다녀야 한다. 더 나아가 내가 강하지 않다는 것을 자책하지도 않는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강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최소한의 졸업 기준 학점이 있고, 최소한의 통과 기준 성적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런 기준을 충족시킨다는 전제 아래에서 그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가 즐겁게 연구하려 한다. 내가 선택한 나만의 연구 주제들을 가지고 계속 이리저리 생각해 보고 고민해 보고 내가 쓸 수 있는 수준의 글을 써 나간다는 것이다.
'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학을 살펴보는 고고학적 태도 (0) | 2025.03.02 |
---|---|
치열한 경쟁 속, 마음의 평정 (2) | 2025.02.02 |
천천히 나의 길을 걸어간다 (10) | 2025.01.01 |
학문적 선배들을 따라서 (8) | 2024.12.22 |
과학철학 연구의 즐거움 (12) | 2024.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