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학문적 선배들을 따라서

강형구 2024. 12. 22. 07:22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나는 실로 이 말에 공감하는데, 왜냐하면 나는 전문적인 학자가 되기 전까지 다른 일들을 하면서 ‘하는 일’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엇인가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것을 본업으로 삼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그것에 대해 애호가로 남게 된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에 대해 영원한 애호가로 남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 일을 해야 한다.

 

   내가 따르는 학문적 전통은 두 갈래다. 하나는 철학의 전통이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아직도 나는 철학과에 소속되어 백종현, 김상환, 김기현, 강상진, 조인래 교수님의 강의를 수강했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박찬국 교수님께서 나의 사주를 봐주셨던 일, 백승영 교수님의 니체 강의, 양선이 교수님의 흄 강의도 기억난다. 이와 결이 다른 또 하나의 학문적 전통은 과학사와 과학철학 연구 전통이며 주로 내가 대학원 석사 과정에서 경험한 것이다. 박사과정 이후 나는 학문적 전통이 아닌 사회생활을 경험했고, 이것은 내가 따르는 일종의 ‘실용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나에게는 하나의 독특한 지향 또는 태도가 있다. 그것은 철저한 전문가 되기를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논리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주 복잡하게 꼬여 있는 기호논리학 문제들을 굳이 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와 유사하게, 일반 상대론의 중력장 방정식 유도 과정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와 관련된 복잡한 연습 문제들을 굳이 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학문을 추구하더라도 교양과 상식을 갖춘 일반인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학문 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주 추상적이고 어렵고 고상한 무엇인가를 한다는 착각을 갖지 않는다.

 

   철학 강의에서 나에게 모범이 되는 분은 백종현 교수님이다. 나는 학부 시절 백종현 교수님의 “철학 개론”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는데, 이 수업에는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교수님은 교재를 거의 보지 않고 판서도 하지 않고 수업 시간 내내 편안하게 대화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셨는데, 나는 어떻게 저렇게 강의를 할 수 있나 의아해했다. 철학자라면 무릇 저렇게 강의 자료를 보지 않고서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당연히 나는 아직 이런 식으로 강의를 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꼭 편안하게 대화하는 방식으로 강의할 수 있는 철학자가 되고 싶다. 백종현 교수님께서 칸트를 연구하셨던 방식은 나의 학문 연구에도 모범이 되어, 나는 교수님과 비슷한 방식으로 라이헨바흐를 연구하고 있다. 그만큼 나에 대한 백종현 교수님의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과학사와 관련해서 나에게 오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분은 영산대학교의 구자현 교수님이다. 나는 학부 시절 구자현 교수님의 “과학사 개론” 수업을 수강했다. 구자현 교수님은 서양과학사 중에서도 물리학의 역사를 연구하시는 분인데, 물리학의 역사와 철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나의 지향성과 맞아떨어진다. 교수님께서는 아마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다. 당시 나는 수업에 참여했던 많은 수강생 중 한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과 사회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이는 나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좀 있다. 나는 여전히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수학사와 물리학사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논리학에 관해서는 내가 진심으로 따를 만한 선배 연구자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박정일 교수님의 교양 논리학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지만, 정작 교수님으로부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배우지는 못했다. 오히려 나는 물리학과 유사한 방식으로 논리학이라는 학문을 파악하려 하는데, 이런 관점은 내가 경상국립대학교에서 “비판적 사고”라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직접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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