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평생 그가 청년 시절 꾸었던 꿈속에서 사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보편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최소한 이 생각이 나에게는 들어맞는 말인 것 같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가장 많이 읽었던 저자는 단연코 아인슈타인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자서전적인 글을 거듭 읽었던 나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를 물리학이 아닌 철학에서 찾았다. 대학에서 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저자는 니체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니체의 책을 읽으며 보냈던 시간도 많았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 시절 니체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려고 했다기보다는, 니체의 생각을 도구로 삼아 그의 생각을 타고 생각의 모험을 하려 했다.
형식적인 절차는 중요하다. 나는 지금껏 살면서 우리 사회의 형식적인 절차를 위배한 적이 없다. 표면적으로는 나의 이력이 다소 이례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잘 들여다보면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늘 우리 사회의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다. 나는 검정고시 제도에 감사한다. 이 제도가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고등학교를 그만둬서 중학교만 졸업한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나는 대학교의 졸업학점 기준 제도에도 감사한다. 졸업학점 기준은 4.3 만점에 2.0이었는데, 이 또한 소수보다는 대다수 학생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뛰어난 소수가 아닌 평범한 다수를 위해 존재하는 우리 사회의 모든 기본 규칙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나는 이런 형식적인 절차 따르기도 일정 정도는 아인슈타인에게서 배웠다. 아인슈타인은 김나지움을 중퇴하고 스위스로 가서 대학입시 시험을 치렀다. 나 또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치른 후 대학입시 시험을 치렀다. 아인슈타인은 대학 졸업 시 성적이 졸업생 6명 중 최하위였다. 나 또한 대학 졸업 시의 순위가 졸업생 27명 중 20등이었으며, 이는 결코 좋은 성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나는 이런 형식적인 기준과 절차에 안도하고 감사하며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누렸다. 나는 지금껏 그 어떤 학자의 권위에도 굴복했던 적이 없다. 나 자체가 지극히 평범하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오히려 나는 그런 평범한 사람으로서 철저하게 사상의 자유를 누리고자 했다.
평범함과 비범함 사이에서의 줄타기. 이 하나의 문장이 지금까지의 내 삶을 요약해 준다. 과학고등학교? 비범한 학생? 아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대다수 사람을 위한 제도인 검정고시를 치렀다. 서울대학교? 비범한 학생? 아니다. 졸업생 중에서도 중하위권으로 졸업했다. 그러면서도 휴학 없이 정확히 4년 만에 졸업했다. 장교? 일반적인 병사는 아니었지만, 장교 제도가 당시 그렇게 인기 있는 제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복무 기간이 길었다. 나에게는 그 시간이 고통과 인내의 세월이었다. 오랜 대학원생 기간? 아니다. 나는 취직을 한 후 대학원 공부를 이어갔다. 이례적이면서도 쉽지 않은 길이었다. 아인슈타인도 스위스 특허청에서 일하면서 박사학위를 받지 않았던가.
내 삶을 뒤돌아보면서 나는 내가 전쟁 통에서 정말 운 좋게 살아남은 군인과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실로 행운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건 적군이 쏜 실탄 한 발이 격발 시 1-2mm 정도만 다르게 조정되었다면 내가 그 실탄에 맞아 죽었을 것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잘나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음을, 이 세상은 실로 우연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음을 실감한다. 그런 실감을 할수록 나는 내가 청년 시절 꾸었던 꿈으로 계속 되돌아간다.
다른 사람과 다투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의 꿈을 현실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꿈? 그것은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좀 더 잘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좀 더 과학철학의 길을 쉽게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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