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철저히 대한민국의 산물이다. 한편으로는 나 개인이 있다. 1982년 부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까지 그곳에서 자란 후, 서울에서 대학 공부를 하고 강원도 홍천에서 군 복무를 하고 다시 서울에서 대학원 공부를 한 뒤 대구를 거쳐 광주에서 살고 있는 내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철학이라는 학문의 전통을 잇는 내가 있다. 나는 대학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석사와 박사 과정에서는 과학사 및 과학철학을 전공했다. 결국 나에게는 학문적으로 철학이 가장 우선이며, 그다음이 과학철학이고, 그다음이 과학사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학문의 전통을 잇고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학문의 가장 오래된 공식적 선조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다. 플라톤은 수학철학을 제시했지만, 그 자신이 수학자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 정확히 말하면, 플라톤은 수학자였을 수는 있을지언정, 수학자이기만 했다면 역사에 남을 정도의 수학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플라톤은 아카데미의 정문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수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는 수학을 철학적으로 성찰하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지 수학을 전문적으로 행하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철학 중에서도 과학철학의 좋은 점은 역사상 주목할 만한 지성들을 그 역사적 계보에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기도 하지만 철학자라는 이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은, 수학자와 물리학자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긴 하지만 그래도 ‘자연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이 아주 억지스럽지는 않다. 아인슈타인도 비슷하다. 아주 철학적인 물리학자, 혹은 아마추어 철학자. 철학이라는 학문이 우리 사회에서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학문의 역사와 전통 관점에서 보면 철학만큼 그 역사가 오래되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학문도 찾기 어렵다.
과학철학은 철학의 하위 분과이다. 이는 내가 과학철학을 정치철학, 종교철학, 예술철학, 윤리학, 사회철학 등과 대등한 위치에 둔다는 것을 뜻한다. 철학은 성찰하는 학문이며, 그 성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인간 활동의 여러 측면이 있다. 과학철학의 전통을 잇는 학자들은 우리 사회에 매우 드물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립대학교인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기준으로 보면, 조인래 교수님이 정식으로 과학철학을 전공하신 유일한 분이다. 이후 인문대학 철학과가 자연대학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과 협력하여 학문 후속세대가 생겼다. 나는 그 산물이다. 철학과가 아니라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철학 그중에서도 과학철학. 이때 과학사는 과학철학을 보조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으로 나타난다. 철학적 성찰을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학문으로서의 과학사에는 별도의 가치와 독립성이 있다. 그러나 과학철학이라는 학문의 관점에서 수용하는 과학사와, 과학사라는 학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과학철학은 서로 다르다. 과학철학은 수단으로서 과학사를 적극 활용하려 하지만, 역사학의 한 분과로서의 과학사는 과학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 역사가의 관점에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실들을 철학적으로 재단하려는 태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적인 상황이 있다. 한국 고유의 역사적 이유로 인해 언어철학, 영미철학, 분석철학 전공 철학자들은 대학의 철학과에서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비해 과학철학 전공자들을 찾기는 어렵다. 철학의 한 분과로서의 과학철학을 한국적으로 잘 정착시킬 필요가 있는데, 그게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이런 문제의식 아래에서 나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한다. 학문으로서의 과학철학이 한국 사회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전파하는 것이, 이 시대에 나를 비롯한 과학철학 연구자들의 역사적 소명일 것이다.
'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학철학 연구의 즐거움 (12) | 2024.12.18 |
---|---|
청년 시절의 꿈 속에서 (4) | 2024.12.01 |
과학철학자의 길 (8) | 2024.11.10 |
철학을 권함 (2) | 2024.10.30 |
연구년에 관한 생각 (6) | 2024.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