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여름,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왜 학교에서 나가야 하냐고 말하던 한 고등학교 친구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친구가 볼 때 나는 참으로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고 늘 그에 관한 책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나에게서는 내가 과학을 정말로 좋아한다는 티가 났다. 단지 나는 문제집을 기계적으로 계속 풀기를 거부했을 뿐, 과학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좋아했다. 그렇게 과학을 좋아했던 나는, 다만 주입식 과학 교육을 받으며 문제를 잘 푸는 머리 똑똑한 학생이 되기를 거부했을 뿐이다.
아직도 나는 2000년에 검정고시 고사장에서 시험을 치렀을 때의 풍경을 기억한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특히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나와 함께 시험을 치렀다. 그때 나는 지금까지는 주류 엘리트 집단에 소속되어 있던 내가 이 사회의 다수이지만 주변적인 집단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런 주변부의 느낌이 흥미로웠고 이를 기억하려 했다. 내가 입시를 준비하던 학원에는 부산국제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나와서 공부하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하나가 검정고시에서 수석을 했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검정고시 수석?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내게는 그런 수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회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과 내가 함께 시험을 치렀다는 게 중요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학교나 학원이 아닌 도서관에서 스스로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일의 가장 큰 장점은 ‘진짜와 가짜를 식별하는 자신만의 관점’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었다. 교수 혹은 권위자의 의견을 굳이 따르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도서관에서 내가 ‘나만의 모험’을 하고 있다고 상상했다. 대학에 가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과학철학에 관련된 수업을 들어도 그것은 내가 바라고 원하던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도서관에서 책들을 찾아 읽으며 스스로 나의 길을 걸어갔다. 그 길은 사람들이 찾지 않고 인기도 별로 없는 한적한 길이었다.
가장 전형적인 철학 교수의 길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학부 시절 학점 관리를 잘하고,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육군사관학교나 공군사관학교 등 사관학교 철학 교수로서 군복무를 한다. 이후 박사 과정에 진학하여 학점을 이수하면서 유학을 준비, 미국 혹은 영국 혹은 독일의 저명한 대학에서 수학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국내로 돌아온다. 이후 국내 대학에서 강의 및 연구하여 경력을 쌓은 후에 대학교수로 임용된다. 나는 이와는 퍽 다른 길을 걸었다. 학부 시절 그저 그런 성적을 얻었고, 육군 정보통신 장교로 전방 부대에서 근무했으며, 석사 이후 직장 생활을 오래 했다. 철학의 끈을 계속 잡고 있되, 철학계가 아닌 다른 곳에서 계속 삶을 경험하며 현실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논리경험주의 과학철학에 관한 연구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이를 연구하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내 생각에 이에 대한 연구는 참으로 가치가 있는데 대체 왜 연구하지 않는가? 이런 문제의식이 학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과학철학 연구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주류 연구가 아니면서도 주류 연구에 못지않은 가치를 갖는 연구 주제들이 많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여전히 비주류다. 주류가 될 수 있으면서도 굳이 주류가 되지 않으려 하고,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래도 당신은 주류 아니오?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내 삶의 자세한 궤적을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검정고시를 치렀던 일, 군대에서 늘 나를 괴롭혔던 위장망 정리하는 일, 아르바이트하며 생활비를 모으던 석사 시절,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고시촌에서 취업 준비하던 일, 대학생 멘토링 사업 때문에 전국의 대학을 돌아다녔던 일, 전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맨땅에 헤딩하며 저울 특별전을 준비했던 일, 직장 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며 이를 악물고 학위 논문을 썼던 일. 이 길의 끝에서 나는 과학철학자가 되었고, 다행히 앞으로는 과학철학의 길만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미 지나온 나의 길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간의 경험이 내 이후의 행보를 더 다채롭게 만들어줄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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