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내가 왜 과학철학을 하게 되었는지를 잊지 않으려 애쓴다. 학생 시절 나는 수학과 물리학이 좋았는데, 왜냐하면 수학을 언어로 삼은 물리학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믿을 만한 설명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서 혹은 학원에서 수학과 물리학의 문제를 푸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고, 이와 관련한 더 풍부한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찾은 것이 수학사, 물리학사에 관한 책이었다. 그렇게 역사를 읽다 보니 사상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부터 ‘철학’이라는 학문에 입문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과학철학’이라는 전문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어버렸다. ‘과학철학’이라는 철학의 한 분야가 있고, 이 분야에 관련한 교과서적인 책들 또한 제법 된다. 대학생을 위한 ‘과학철학’ 교양 강의를 위한 적법한 교재들이 있고, 그 교재들 속 내용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전문 분야에 친숙해지다 보면 중요도 혹은 본질이 전도된다. 나는 어린아이였던 시절 아버지와 함께 동네 근처의 산을 오르며 자연 현상의 규칙성과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과학과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가 그 어린 시절 느꼈던 자연에 대한 감동은 어른이 되고 박사가 된 이후 종종 희미해지곤 하는데, 나는 그 때의 그 느낌을 다시 떠올리려 의식적으로 애쓴다.
과학철학을 연구하면 할수록 나는 역설적으로 과학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게 된다. 과학은 중요하다. 그러나 과학만큼이나 중요한 숱한 것들이 이 세계 속에 있다. 과학은 역사적 변천을 겪었고, 어느 시대에서든 사회가 과학에 요구하는 바를 과학자들이 실제로 행해 왔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할 일을 충실히 할 따름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의사’들에 대한 선망과 환상이 강하게 퍼져 있는데, 사실 ‘의사’ 역시 일종의 직업이며 의사들은 그저 묵묵하게 자신들이 할 일을 할 뿐이다. 의사가 요리사나 공학자와 크게 다를까? 여기서 나는 오히려 차이보다는 유사성을 본다. 과학자, 의사, 요리사, 공학자 모두 인간 사회가 필요로 하는 특수한 기능을 행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물론 부의 분배는 편중되어 있고, 나는 이것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느낀다. 하지만 부의 분배 자체가 전반적으로 인간 사회 내에서는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주식 투자를 통해 운 좋게 과도한 이익을 창출한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이 자본을 축적한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 사람이 불법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식으로 임의적이고 작위적으로 부가 분배되는 것이 인간 사회를 유지하고 작동시키는 중요한 동인 또는 기제라고 본다. 나는 인간이 자신의 생명과 장수(長壽)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의사를 중요한 직업으로 평가하게 된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의사에 대한 ‘선망’은 일종의 거품이자 환상이다. 의사들 자신도 이러한 선망이 거품이자 환상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과학철학은 과학을 성찰하고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는 작업이다. 나는 과학철학이 과학의 본질을 완전하게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철학은 그저 과학자조차도 가끔 잊어버리곤 하는 질문, 즉 왜 과학이 이렇게 잘 작동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과학적 지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 생각하고 답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생각과 의미 부여는 늘 필요하다. 이는 모든 시대의 인간에게 자기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직접 따져 묻는 것이 꼭 필요한 것과도 같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 살며, 과학은 인간이 세계와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이자 지금까지 세계에 관해 축적해 온 지식의 총체이다. 그러므로 과학철학은 21세기의 인간이 자연을 성찰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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