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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이론과 시공간(1/3)

라이헨바흐는 1915년에 에를랑겐 대학에서 수학 교수와 철학 교수의 공동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는 “물리적 실재를 수학적으로 표상하는 데 있어 확률 개념이 하는 역할”이었다. 라이헨바흐는 확률의 원리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지식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칸트가 말했던 ‘선험적 종합 원리’(예를 들면, 시간, 공간, 인과성의 원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확률의 원리가 물리적 지식의 가장 기초적인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칸트 철학의 형식을 빌려 제시한 것이다. 박사 학위 취득 직후 그는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에 참전했다. 그는 통신부대에서 일했는데, 아마 뛰어난 공학적 계산 및 추론 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쟁 중에 병에 걸려 도중에 전역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통..

상황과 스타일에 맞게 사는 것

나에게는 나의 인간적인 스타일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은 아니다. 나는 이것저것 다양한 일을 벌여서 진행하는 사람이 아니며,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조용히 차분하게 해 나가는 사람이다. 부산에서 살 때도, 서울에서 살 때도, 강원도 홍천에서 군 복무를 할 때도,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았고 그저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글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학교, 군대, 직장 등은 내가 사회적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그 모든 사회적 조직에서 나는 평균적인 수준으로 일했으며 남들의 눈에 띄게 특출한 역량을 발휘한 적은 없었다. 내가 공부 혹은 연구에서 특출나지 않다는 사실은 내 삶의 이력을 보면 잘 드러난다. 부산과학고..

일상 이야기 2024.04.13

경험주의 과학철학(3/3)

특정 시대의 과학기술이 보인 성공을 조직의 권력 체계와 분리하여 탐구한 것은 그리스인의 큰 공헌이었고, 소크라테스 시대에 이르러 논리적 정합성과 사유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것 또한 그리스만의 중요한 공헌이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은 실용적 수리과학의 연역적 재구성이 성공했다는 실제 현상에 신화적이라 할 수 있는 환상적인 해석을 부여했다. 기하학으로 대표되는 수학은 실제 세계의 다양한 측면들에 잘 적용이 되는데, 실제 세계에서는 수학적 개념(원, 삼각형, 사각형 등)들과 완벽하게 합치하는 대상을 찾을 수 없으므로, 수학적 개념의 세계가 실제 세계와는 별개로 존재한다는 해석이었다. 이러한 해석의 위안과 매력은 너무도 강력하여, 소크라테스는 육체가 죽어도 정신이 불멸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

경험주의 과학철학(2/3)

모든 시대의 철학자들에게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은 일종의 ‘해석 대상’이다. 20세기의 경험주의자 라이헨바흐는 ‘사변철학’ 대 ‘경험주의 철학’이라는 대립 구도를 설정하여 그리스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전개하지만, 나는 상황을 그와는 약간 다르게 바라본다. 인간이 언어를 만든 후 인간 공동체가 언어가 만들어 내는 서사적 세계 속에서 살게 되면서, 그러한 서사적 세계가 인간 조직을 통치하는 정치권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신화적 세계관’이 등장했다. 초기에는 과학기술 문명의 의미마저 이 신화적 세계관 속 일부에 지나지 않았는데, 변방에 있던 그리스인들은 과학기술 문명이 갖는 의미에 대해 동방과는 ‘다르고’ ‘독특하게’ 해석했고, 바로 그 점에서 역사 속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었다. 그리스인들의 공헌은 두..

경험주의 과학철학(1/3)

생명체인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 실제로 오래전부터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다양한 현상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살아왔다. 주로 인간의 생존과 밀접하게 관련된 여러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은 자연에 대한 체계화된 지식을 축적해 왔다. 아마도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연에 대한 지식의 축적, 개선, 전파를 위해 언어의 발명 및 정교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언어를 통해 인간은 세계의 여러 현상을 본뜨고 세계의 탄생과 발전에 대한 단순한 형태의 서사(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로 인간 개인 혹은 인간 공동체에 중요하게 떠오른 것은 ‘해석’과 ‘의미’이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성공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집단을 이루어야 했고 개체들 사이에서의 ..

교수의 삶은 여유롭지 않다!

나의 경우 아직 교수로 정식 발령을 받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약간 조심스럽긴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판단할 때 교수의 삶은 결코 여유롭지 않다는 것이 나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나의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비교를 해보자. 교수의 하루 일과는 내가 한국장학재단이나 국립대구과학관에서 일할 때와 비교할 때 결코 더 여유롭지 않으며, 오히려 더 일정이 빡빡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왜 그런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다. 이번 학기에 나는 9학점을 담당하며, 수업은 화-수-목요일에 있다. 월요일에 화요일 수업을 준비하고, 화요일에 수요일 수업을 준비하며, 수요일에 목요일 수업을 준비한다. 모두 처음 담당하는 과목들이라 월, 화, 수요일을 온전히 수업 준비에 바쳐도 시간이 모자란다.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연구자..

일상 이야기 2024.03.28

교육자의 집안

내가 올해 3월부터 국립대학교의 교원이 되면서 우리 가족의 정체성에 약간의 변화가 있다. 나의 친가 및 외가 친척 중에는 박사학위 소지자를 찾기가 어려운데(먼 친척 중에는 당연히 박사학위 소지자가 있겠지만), 작년 2월에 내가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우리 집안에도 박사가 배출되었다. 내가 교수가 되기 전까지 우리 집의 주된 정체성은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누나가 초등 교사(교육 공무원), 매형이 국립대학교 직원, 나와 아내가 국립과학관의 연구원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교수가 되었으니 우리 가족은 교육자의 집안이 되었다. 나와 누나 모두 교육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사실 내가 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교육 공무원이 되면서부터 좀 더 언행을 조심하게 된다. 공공기관 직..

일상 이야기 2024.03.24

카페에서 멍하게 있는 시간

오늘은 목포대학교에서 오후 수업을 끝내고 곧장 전북대학교에 가서 과학학과 구성원들을 위한 강연을 했다. 까마득한 선배 교수님들께서도 강연에 참여하셔서 다소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재밌게 한 것 같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광주에 있는 숙소 근처로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는 투룸에 들어가기가 다소 적적해서 그냥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갔다. 마침 저녁 식사 후 커피를 마시지 않은 상태여서 카페에 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켰다. 이제 다소 익숙해진 카페라 늘 내가 앉는 자리가 있다. 창밖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약간 지친 느낌이 들어서인지 몰라도 나는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조금씩 마시며 그냥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이들과 영상 통화..

일상 이야기 2024.03.21

한스 라이헨바흐와 20세기 경험주의 과학철학(2/2)

고대 그리스에서 경험주의와 이성주의를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대표한다면, 근대 이후 경험주의와 이성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는 영국의 흄과 독일의 칸트이다. 흄과 칸트가 등장한 맥락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등장했던 맥락과는 사뭇 달랐다. 두 사람은 뉴턴 역학의 눈부신 성공이라는 배경 속에서 등장했으며, 뉴턴 역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흄은 뉴턴 역학의 ‘방법론’을 인식론에 도입하고자 했다. 뉴턴은 자신의 이론을 데카르트의 이론과 대조하며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라고 했다. 뉴턴에 따르면, 그는 케플러의 3가지 행성 법칙을 일종의 ‘현상적 법칙’으로 수용한 후, 귀납의 절차를 통해 이러한 현상적 법칙들을 더 높은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는 일반 법칙을 추론했다. 이때 그는 현상적 법칙을 일종의 ..

욕심 없음의 묘미

생각하면 할수록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나의 경우 결과적으로 보면 욕심을 버리는 것이 욕심을 부리는 것보다 더 나에게 이로웠다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사실 나도 왜 그럴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욕심을 버리는 것이 나의 성격 혹은 기질에 더 잘 맞았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곧장 대입 입시학원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한동안(거의 고등학교 2학년 말까지) 부산 시내에 있는 도서관들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읽고 싶은 책들(주로 과학의 역사와 철학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만약 내가 대입 입시만을 목표로 했었다면 그런 정신 나간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스스로 책을 읽고 생각한다는 행위는 퍽 소박한 것이었다. 책들은 공공시설인..

일상 이야기 2024.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