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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라는 상징

매년 1월 1일 새벽이 되면, 부산에 살고 있던 우리 가족은 동해안으로 이동하여 떠오르는 태양을 보곤 했다. 부모님과 누나와 나는 새벽 5시 전후로 일어나 약간의 먹을거리를 챙긴 후 승용차를 타고 동해안인 칠암방파제 근처로 이동해서 30분쯤 기다렸다가 바다 수면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렇게 우리 가족은 매년 새해를 기념했고, 이후 칠암 근처에 있는 절인 장안사를 찾아 부처님께 인사드린 후, 자주 찾아가는 칼국수 집에 들러 칼국수와 두부를 아침으로 먹곤 했다. 누나와 내가 결혼을 한 후에는 우리 가족의 이런 전통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러나 올해 나는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가 이 전통을 지켰다. 예전에는 아버지께서 운전하셨지만, 올해에는 내가..

일상 이야기 2024.01.01

2023년 결산, 2024년 계획

방금 2023년 2학기 수업의 성적 입력을 끝냈다. 이제부터 진정한 연말 휴가가 시작된다. 학생들이 성적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있지만, 큰 문제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집에서 아이들 돌보고, 회사에서 일하고, 대학에서 강의하느라 피로가 누적되고 면역력이 떨어진 것 같다. 예전에 한 번 겪어 본 적이 있는 대상포진(帶狀疱疹)이 연말에 내게 찾아왔다. 그래도 그 정도가 예전보다는 심하지 않아, 금방 건강을 회복할 듯하다. 돌아보면 참으로 2023년을 바쁘게 보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박사학위를 끝냈다는 것이다. 2023년 2월에 겨우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에는 직장에 복직하기 전까지 라이헨바흐의 [경험과 예측] 번역에 주력했다. 초벌 번역을 끝낸 후 출판사에 원고를 넘길 수 있었다. 한국과학철학회 연례..

일상 이야기 2023.12.29

조용하고 복된 성탄

며칠 전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뭐 하세요? 무슨 특별한 계획 있으세요?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셨나요? 이 물음들에 대해 나는 단순하게 대답했다. 다른 계획은 없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게 전부입니다. 사실 예배를 드리는 게 제일 중요하고요, 예배드리면서 느끼는 감사함의 감정이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에 비한다면 물질적인 선물은, 받으면 좋기는 하지만 안 받아도 그만인 그런 선물입니다. 성탄절 예배 끝나고 집 근처 장난감 가게에 가서 아이들에게 하나씩 소박하게 사 주려 합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나를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러한 생각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 어린 시절부터 절에 자주 다녔다. 한국의 승려들에 관한 이야기책도 자주 ..

일상 이야기 2023.12.25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존경하되 추종하지는 말라. 언제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다. 설혹 내가 아닌 남을 위해 혹은 어떤 이상이나 신념을 위해 나를 희생하거나 헌신하더라도, 그러한 희생 혹은 헌신은 철저히 자기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내가 축구선수라면 내가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열심히 꾸준히 계속 축구하면 되고, 내가 과학철학 연구자라면 내가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열심히 꾸준히 계속 나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과학철학 연구를 하면 된다. 물론 이때 유의해야 하는 것은 편협하거나 권위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건전하고 합리적인 조언과 충고는 ..

일상 이야기 2023.12.21

실용주의적 관점

나는 평소 여러 가지 상황을 대할 때 미시적이고 국소적인 관점을 취한다. 예를 들면, 나는 나라는 사람을 나의 가족이란 특수하고 국소적인 환경에서 등장한 산물이라고 본다. 나는 1982년에 태어난 이후로 나의 가족이란 환경에서 적응하고 투쟁하면서 지금까지 내 인생의 각 단계를 거쳐 왔다. 내가 다녔던 청운 유아원, 명륜 유치원, 명륜 초등학교, 동해 중학교는 내 삶의 형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부산과학고등학교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철저히 한국적인 교육제도 아래에서 특정한 집단에 속해왔고, 그 집단에서의 경험을 통해 내 삶을 형성해 왔다. 매 단계에서 나는 내가 속한 집단 안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협력하고 경쟁하며 나의 삶을 운영했다. 부산과학고등학교에서 자퇴했다는 것은 한국적 교육제도 아래에서의 ..

일상 이야기 2023.12.18

늘면 하는 게 아니라 하면서 는다

너무 고민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일단 해라.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길지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내린 결론이다. 일단 그 일을 해봐야 내가 상상했던 것과 실제가 얼마나 비슷하고 다른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일을 해보지 않으면 계속 그 일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을 가지고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일을 해보지 않으면 그 일을 내가 잘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일단 그 일을 해봐야 한다. 너무 고민하다 보면 시기를 놓치기 십상이다. 그 일에 대한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일을 해보면, 사람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과학철학이라면 실질..

일상 이야기 2023.12.14

사람에게는 각자 할 일이 있을 뿐

올해의 경우 첫째 지윤의 생일과 아버지의 생신이 비슷한 시기로 겹쳤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지난 금요일 나와 아내의 퇴근 이후 짐을 꾸려 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금요일 밤 10시쯤 부산 명륜동 집에 도착했다. 부산에 내려가면 부모님께서 아이들 특히 둘째와 셋째를 잘 봐주시기 때문에 나에게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생기는 편이다. 나는 이미 우리나라 나이로 마흔이 넘었지만, 부모님에게 나는 언제까지나 책상물림인 세상 물정 모르는 아들이다. 부산에만 가면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배려를 받는 사람이 된다. 애들은 우리가 봐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공부하고 오너라. 어머니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특히 어머니가 내게 그러셨다.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너는 그냥 공부하거라.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

일상 이야기 2023.12.11

변두리에서 음악을 들으며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나는 늘 음악에 취해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고정식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을 들었고, 중학생 시절에는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와 CD 플레이어로 음악을 들었다. 특히 공부할 때 늘 음악을 들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힘겨운 두뇌 노동을 반복했다. 음악이 없었다면 그렇게 반복적인 두뇌 노동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음악, 소설, 영화 등과 같은 예술에는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어떤 몽환적인 요소가 있는데, 나는 그런 예술의 몽환적인 힘을 빌려 공부를 해나갔다. 음악은 내게 허락된 합법적인 마취제와도 같았다. 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어 실제 세계와 거의 같은 게임을 만드는 것을 상상하기도 했는데, 이런 상상은 주로 영화와 소설 속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지극히 평균적인 지능을 ..

일상 이야기 2023.12.07

학습하는 인간

수학과 물리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일례로, 나는 인하대학교 물리학과 차동우 명예교수께서 쓰신 물리학 책들은 거의 다 구입했고, 차동우 교수님의 물리학 유튜브 채널 구독자이다. 또한 나는 요즘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출판한 [대학수학] 교재의 워크북을 읽으면서 그곳에 수록된 연습문제를 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내가 수학과 물리학을 ‘잘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수학과 물리학에 관심을 갖고 계속 그 과목들을 스스로 공부할 뿐이다. 내가 인공지능에 관심을 갖지 않을 이유 또한 없다. 왜냐하면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여러 가지 게임을 즐겼고, 학생 시절부터 먼 훗날 실제 세계와도 같은 가상의 세계를 게임 속에 구현할 수 있을 ..

일상 이야기 2023.12.04

신뢰의 중요성

어떤 사람에게 실력이 있으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가 더 강하게 생기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실력이 있다고 해서 곧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력과 신뢰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실력이 좋다고 해서 곧 신뢰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뢰는 실력과는 다소 독립적인 요소이며, 일종의 태도와 의지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는 실력뿐만 아니라 그와 다른 요소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어쩌면 실력은 오직 신뢰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신뢰도로부터 비롯된다. 과연 그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인가? 신뢰의 의미는 맥락에 따라서 달라진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 신입생을 선발한다고 ..

일상 이야기 2023.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