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사람에게는 각자 할 일이 있을 뿐

강형구 2023. 12. 11. 00:12

   올해의 경우 첫째 지윤의 생일과 아버지의 생신이 비슷한 시기로 겹쳤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지난 금요일 나와 아내의 퇴근 이후 짐을 꾸려 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금요일 밤 10시쯤 부산 명륜동 집에 도착했다. 부산에 내려가면 부모님께서 아이들 특히 둘째와 셋째를 잘 봐주시기 때문에 나에게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생기는 편이다. 나는 이미 우리나라 나이로 마흔이 넘었지만, 부모님에게 나는 언제까지나 책상물림인 세상 물정 모르는 아들이다. 부산에만 가면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배려를 받는 사람이 된다.

 

   애들은 우리가 봐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공부하고 오너라. 어머니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특히 어머니가 내게 그러셨다.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너는 그냥 공부하거라.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챙겨 명륜동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내게 익숙한 카페를 향했다. 내 가방에는 늘 읽을거리가 있다. 나의 고유한 연구와 관련된 책 또는 논문이 있고, 매달 진행하는 책 및 논문 읽기 모임과 관련한 읽기 자료가 있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책 또는 논문을 읽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간다. 몇 시간 동안 앉아서 공부해도 전혀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다.

 

   그렇게 토요일 오전과 오후를 보냈다. 토요일 저녁에는 부산에 살고 있는 누나네와 함께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금정산성 안쪽에 있는 음식점에 갔다. 온 가족이 모여 왁자지껄하게 이야기하며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었다. 아버지께서는 경상북도 성주에 있는 농막에서 작물들을 가꾸시는 것이 자기 삶의 낙이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자주 성주에 들르셔서 직접 거름을 주시고, 풀을 베시고, 김을 매신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농사일에 익숙하지 않다. 며칠 전에는 아버지, 어머니, 장모님 등 어르신들이 성주에 모여 김장하셨다. 아마 먼 훗날 아내와 나는 어르신들의 도움 없이 직접 김장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일요일인 오늘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김없이 간단한 아침 식사 후 익숙한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을 시킨 후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그저 그것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에는 큰돈이 들지 않는다. 커피 한 잔의 값을 낼 수 있으면 된다. 다음 주에 있을 경상국립대학교 강의를 준비하고, 평소에 읽고자 했던 책과 논문을 읽는다. 이제 이번 학기 강의는 거의 끝나간다. 다음 주가 마지막 강의이고, 그다음 주에는 기말고사를 본다. 국립대구과학관에서의 한 해 업무도 거의 막마지에 이르렀다. 이제는 정말 한 숨 돌리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고, 내년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이다.

 

   부모님에게 부모님이 하시는 일이 있듯, 부모님과 다른 나에게도 그저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나는 글을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이 뭔가 특별하고 고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농부가 농사를 짓고, 미술가가 미술 작품을 그리고, 음악가가 작곡하고 연주하는 것처럼, 과학철학 연구자로서 나는 그저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할 뿐이다. 과학철학이라는 하나의 분과 학문에서도 많은 세부 주제가 나누어지고, 나는 그중에서 논리경험주의의 역사와 철학 및 경험주의 철학 일반을 연구한다. 나는 오늘날 매우 중요해진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갖는 철학적 함의 역시 경험주의 철학의 맥락 아래에서 해명하고자 하고 있다.

 

   과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 과학철학을 연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철학은 나의 운명이며 천직이다. 내가 과학관에서 생계를 위해서 하는 일이 꼭 과학철학 연구와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과학철학 연구자이며 과학철학 연구자답게 과학관에서의 업무 또한 이행할 것이다. 책을 번역하고, 논문을 쓰고, 강의하는 등 과학철학 연구자로서 해야 할 일이 많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각자 할 일이 있고, 나는 그저 과학철학 연구자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해 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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