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도서관형 인간

강형구 2025. 7. 7. 16:34

   고등학교 2학년 여름에 학교에서 나왔던 나는, 학교 대신 시립 도서관으로 출근 비슷한 것을 시작했다. 나는 아주 성실하게 출퇴근했고, 업무 시간에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했다. 내가 하는 일이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생각하며 노트를 꺼내 글을 쓰는 일이었다. 어머니께서 도시락을 싸 주시는 경우에는 도서관 식당에서 도시락을 꺼내 먹었고, 아닌 경우에는 도서관 식당에서 사 먹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는 어쩔 수 없이 입시 준비를 위한 학원에 다녔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던 학원이었다. 아침 일찍 학원까지 걸어가서 밤늦게 돌아왔고, 그때도 대개 어머니께서 도시락을 싸 주셨다. 나는 정규 수업이 끝나고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좋았다. 처음 학원에 가서 모의고사를 보니 성적이 형편없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그냥 꾸준히 성실하게 내가 할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성적이 계속 올랐다. 나는 수능을 볼 때까지 성적을 지속적으로 올렸고, 그 성적으로 대학을 갔다.

 

   대학에 가니 남는 시간이 많았는데 딱히 할 일은 없어, 나는 그냥 도서관으로 출퇴근했다. 아침에 일찍 학교에 가서 아침밥을 사 먹은 후, 도서관에서 책 읽고 생각하며 글을 쓰다 수업이 있으면 수업에 참여했다. 수업이 끝나면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좀 지루하다 싶으면 도서관에서 나와 학교를 산책했다. 학교가 산속에 있어서 산책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산책하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고, 도서관이 끝날 때까지 남아 있다가 숙소로 돌아갔다. 학기 중에도, 방학 중에도 그렇게 살았다.

 

   대학에 있을 때 나는 내가 일종의 ‘들러리’ 아닐까 하는 생각하기도 했다. 정말 잘나가는 선배들, 동기들, 후배들이 우리 학교 출신이란다. 그런데 사실 그런 잘나가는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성적이 좋지도 않았고 인기도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들러리’가 될 셈이었다. 그런데 ‘들러리’가 대수인가?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도서관형 인간으로서 살았다. 군대에 가서도 일이 없으면 대개 내가 근무하던 홍천군에서 설립한 군립 홍천도서관에 가서 아침부터 밤까지 시간을 보냈다.

 

   대학원에 가면 연구실을 준다. 그런데 사실 나는 연구실보다는 도서관이 편했다. 취직 준비를 할 때는 구립 관악도서관에 다녔다. 아내와 결혼하기 전 우리는 데이트를 정독도서관에서 자주 했다. 지금 살고 있는 테크노폴리스 근처에 있는 달성도서관도 자주 이용했고 지금도 자주 이용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대학원 수업을 들을 때 달성도서관에서 수업 과제를 작성했던 기억이 난다. 여전히 아이들을 데리고 달성도서관에 자주 다녀온다. 도서관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고 느긋하게 이런저런 책들을 구경할 수 있다.

 

   대학교수가 된 후 나는 학교에서 대개 연구실을 이용하지만, 학교에서 일이 없을 때는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선호한다. 사람들 속에 파묻혀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도서관의 많은 책을 보면서 나는 거듭 자신이 겸손해짐을 느낀다. 이 멋진 책들을 봐라. 내가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겠나. 그러니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하게 하자. 내가 훗날 도서관에 꽂힐 수 있는 책을 쓰거나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게 무슨 대수냐. 그냥 나는 내 할 일을 열심히 성실하게 하면 된다.

 

   나는 나의 정체성을 ‘도서관형 인간’이라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철학 연구자, 혹은 과학철학 연구자라는 이름은 나에게는 다소 잠정적인 이름일 뿐이다. 어쩌면 ‘도서관형 인간’은 이 세상에 도서관이 생긴 이래로 계속 존재해 오지 않았을까. 나중에 교수에서 퇴임한 뒤에는 더 마음 편하게 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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