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에서 대학교수가 된 사례는 내가 처음이다. 그렇다고 나는 내가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교수가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노력했고, 무엇보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나의 아이들 역시 나처럼 공부하는 것을 좋아할까? 나는 이를 크게 바라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제각각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 있으며, 아이들은 그저 자신들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 된다. 굳이 그 일이 공부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서울대학교와 같이 국내에서 매우 유명한 대학의 과학철학 교수였다면 나는 나의 역할에 대해 큰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부담 없이 자유롭게 내가 지금까지 추구해 온 과학철학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다. 백종현 교수님이 칸트 철학 연구의 화신이었다면, 나는 라이헨바흐 과학철학 연구의 화신이 될 것이다. 나는 오히려 내가 백종현 교수님보다 더 좋은 사정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라이헨바흐는 현재로서는 국내에서 칸트만큼 잘 알려진 철학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남들이 많이 선택하지 않는 블루오션을 선택했다. 이 선택에는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나의 선택에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으리라 기대한다.
사실 나는 이게 그저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학부 시절부터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을 연구했고, 지금껏 그의 책 5권을 번역했으며, 그의 철학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완성하면서 다수의 학술논문을 발표했고, 올해 그의 책 2권을 추가로 번역해서 출판할 예정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설혹 내가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나는 한국의 라이헨바흐 과학철학 연구자로서 공식적인 기록 속에 남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현재 건강한 편이고 앞으로 25년 정도는 계속 학술 활동을 해 나갈 예정이므로, 나는 내게 남은 25년 동안 계속 라이헨바흐 과학철학을 연구할 계획이다. 그동안에도 나로부터 계속 학술적인 성과가 나올 것이라 예상할 경우, 나는 지금보다 더 확고한 라이헨바흐 과학철학 연구자로서 남게 된다.
나는 골프를 치지 않고,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며, 별다른 취미도 없다. 고작 내가 틈틈이 하는 일이란 산책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닌텐도 스위치 게임기를 가지고 “젤다의 전설”과 같은 오픈 월드 게임을 할 뿐이다. 돈을 많이 벌고 싶지도 않고, 조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지도 않다. 그저 나는 계속 내가 원하는 과학철학 연구를 하고 싶을 뿐이다. 끝까지 나의 길을 걸어가 보고 싶다. 나는 세상에서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라이헨바흐 과학철학이라는 철학 분야의 훌륭한 업적을 완전히 한국화시켜서 우리나라에 단단하게 뿌리내리게 하고 싶다. 내가 살아있을 때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훗날 누군가가 발견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충분한 문헌을 남겨두고 싶다.
그러면 당신은 대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는 거요? 매일 그렇게 번역하고 논문을 쓰면서 평생을 보내고 싶은 거요? 사실 그렇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딱히 바랄 게 없으며 행복한 삶이란 게 그다지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나는 내 삶의 절반을 살았다. 지금까지의 내 삶도 퍽 행복한 삶이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서민적인 행복이었다. 앞으로 특별하게 다른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냥 계속 내가 가던 길을 가면서 살고 싶다. 나는 학생 시절부터 애늙은이란 소리를 듣긴 했지만, 이미 나의 청춘은 다 지났다. 이제 늙다가 죽는 일밖에 없다.
가끔 나는 내 아이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내가 살다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아이들이 이 세상에 남아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더욱더 내 삶에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냥 나는 천천히 계속 내 길을 걸어간다. 그 길에 벗이 있어도 좋고, 사실 없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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