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과학을 살펴보는 고고학적 태도

강형구 2025. 3. 2. 07:33

   돌이켜보면, 나는 정규 과정에서 과학을 배울 때 군인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느꼈다. K-2 소총에 대해서 배울 경우, 훈련병은 이 소총의 제원과 기능에 대해서 학습하지만, 이 모든 학습은 결국 소총을 잘 쏘기 위한 것이다. 소총을 잘 쏘기 위해서 많은 연습 사격을 시행한다. 100명의 훈련병은 20발 중 20발을 맞추는 사람, 20발 중 12발을 맞추는 사람 등으로 분류된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연습 사격을 하고, 그렇게 훈련을 받은 이후 훈련병들은 정식 군사로서 실전에 투입된다. 결국 훈련의 목표는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전투 병력을 양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훈련병은 기계가 아니다. 훈련병은 왜 내가 이 훈련을 받아야 하는지, 지금 내가 참여하고자 하는 전쟁은 왜 일어났는지 물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인간이 역사 이래 어떤 전쟁을 치러 왔는지, 전쟁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또한 내가 예전에 군인으로서 배워 왔던 내용이 정말 맞는 건지, 왜곡되거나 잘못된 부분은 없는지 따져 볼 수도 있다. 전쟁에 투입되기 위한 훈련병의 비유를 들 수 있지만, 이와 비슷하게 제품을 만드는 공장의 현장에 투입되기 전에 훈련하는 기능공을 생각해도 된다. 훈련병이나 기능공 중 어떤 사람은,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생각해 보고 다른 사람의 생각(책)을 찾아보기도 한다.

 

   예전부터 내가 과학에 대해 가졌던 바람은 아인슈타인 혹은 파인만과 같은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꾸려가는 과학 공동체에서 그와 같은 특출난 사람은 으레 생기기 마련이고, 어쩌면 그런 사람이 나타나게 하기 위한 효율적인 장치가 과학 공동체라고도 할 수 있다. 오히려 나는 고고학적인 마음으로, 인간 공동체가 행했고 지금도 행하고 있는 과학이라는 현상을 살펴보고자 했다. 이것은 비평하고 평가하려는 태도는 아니다. 그저 흥미를 갖고 살펴보며 과학이라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제안하려는 것이다. 뉴턴의 보편 중력 법칙에 관한 이야기,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에 관한 이야기. 이야기를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것은 아니다. 현상이 흥미로우니까 그 현상을 설명하려 하고, 그 설명이 이야기 형식을 띤다. 이야기가 아닌 설명이 있을까? 그건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과학이라는 현상을 고고학적으로 살펴보는 일을, 과학 ‘공부’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건 학생들의 공부, 예비 과학도들의 공부와는 다소 다른 형태의 공부일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공간을 물리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의 역사에 호기심이 생겨 물리적 기하학에 관한 리만(Riemann)의 논문과 헬름홀츠(Helmholtz)의 논문을 찾아 읽었는데, 이런 탐구가 오늘날의 과학 실천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성찰이 과학적 실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 역시 학생 시절 흄, 칸트, 마흐를 읽었으며, 물리학자가 된 이후에는 뒤엠, 슐리크, 마이에르송 등을 읽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실용적인 쓸모는 아니지만, 쓸모가 있긴 하다.

 

   인간 공동체에는 과학을 하며 기쁨을 느끼는 개체들이 많지만, 이와 약간 결이 다른 과학 고고학을 하며 기쁨을 느끼는 개체들도 있다. 후자의 종류에 해당하는 개체들을 위한 학문의 영역이 바로 과학의 역사, 과학의 철학이다. 과학기술정책은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과학적 실천에 참여하려는 분야이다. 나는 나 자신을 과학에 대해 기본적인 흥미, 관심, 우호감을 가진 채 과학이라는 현상을 고고학적인 방식으로 탐구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늘 내 전공인 과학철학의 담론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하는 이야기, 과학자 공동체가 집단으로 구성해 나가고 있는 과학 지식의 더미들을 계속해서 살펴보려 한다. 이러한 활동이 나 자신에게 흥미롭고, 사회적으로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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