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퍼트남, ["의미"의 의미] 요약 정리

강형구 2016. 10. 5. 06:45

 

 

힐러리 퍼트남(Hilary Putnam),의미의 의미(The Meaning of "Meaning")

  

   우리가 사용하는 자연언어의 의미를 따지는 문제는 중요한 언어철학적 문제이다. 퍼트남은 언어에 있어서도 문장의 의미를 따지기보다는 단어의 의미를 따지려고 한다. ‘토끼’, ‘’, ‘과 같은 단어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단어의 의미는 다름아닌 그 단어의 외연이라고 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답은 유지되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어떤 대상이 그 단어가 말하는 부류에 포함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경계 사례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만약 심장을 가진 존재신장을 가진 존재의 외연이 같다고 해도 그 두 표현의 의미가 같다고 말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미는 외연과는 대비되는 내포일 것인데, 과연 내포란 무엇인가?

  

   퍼트남은 의미에 관한 전통적인 이론의 도전받지 않은 두 전제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한 단어의 의미(내포)를 아는 것은 곧 한 개인이 특정한 심리적 상태에 있는 것과 같다. 둘째, 한 단어의 의미가 그 단어의 외연을 결정한다. 퍼트남이 생각할 때 위의 두 전제들은 동시에 성립될 수 없으며, 특히 그는 두 전제들 중 첫 번째 전제를 비판하고자 한다. 이 때 첫 번째 전제에서 말하는 것은 철학에서의 방법론적 유아론의 입장이다. 의미에 대해서 방법론적 유아론에서처럼 협소한 의미의 심리적 상태를 전제할 경우, 두 사람 OE가 단어 A를 서로 다르게 이해했을 때 두 사람의 심리적 상태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자면, 어떤 단어 A에 대해 두 사람 OE가 동일한 심리적 상태에 있다면 두 사람에게 그 단어의 의미는 동일하고, 그 단어의 의미가 동일하다면 그 단어의 외연 또한 다를 수 없게 된다.

  

   퍼트남은 이를 반박하기 위해, 두 사람이 어떤 단어에 대해 동일한 심리적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 단어가 두 사람이 처한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외연을 가질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가상적인 상황을 상상한다. 은하계에 쌍둥이 지구가 존재하는데, 이 쌍둥이 지구는 지구와 거의 똑같다. 쌍둥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도 지구인들과 같은 언어를 쓴다. 다만 틀린 점이 있다면 지구에서는 물의 분자식이

인 반면 쌍둥이 지구에서는 물의 분자식이

이다. 지구인들과 쌍둥이 지구인들 모두

이라고 부르고,

의 표면적인 성질들(액체이고, 투명하고, 마시면 갈증을 해소시켜주고 등등)은 물과 똑같다.

  

   만약 지구에서 우주선을 보내 쌍둥이 지구에 도착했다고 가정해보자. 처음에 지구인들은 쌍둥이 지구인들이 이라 부르는 물질이 지구의 물과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이후 화학적인 분석을 통해 이 물질이

가 아닌

임을 알게 될 것이고, 이는 우주선을 통해 지구에 도착한 쌍둥이 지구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의 표면적인 성질이 동일하기 때문에, 지구인이 이라고 얘기할 때와 쌍둥이 지구인이 이라고 얘기할 때 그 두 사람은 동일한 심리적 상태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사람 각각이 말하는 의 외연은 서로 다른데, 왜냐하면 지구인에게 있어서 단어 의 외연은

인 반면 쌍둥이 지구인에게 있어 단어 의 외연은

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가상적 상황을 통해 우리는 개인의 심리적 상태가 한 단어의 외연을 결정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 퍼트남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한 단어의 외연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이에 대해 퍼트남은 사회언어학적 가설을 내세운다. 그는 우리의 언어공동체에서 언어적 노동의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공동체 내에서 어떤 사람들은 으로 만들어진 반지를 끼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으로 만들어진 반지를 팔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의 금반지가 정말로 금으로 만들어졌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하는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 때 모든 사람들이 어떤 물질이 정말 으로 만들어졌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필요는 없다. 만약 그러한 확인을 하고 싶을 경우, 공동체 내에서의 협동작업을 통해서 금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공동체 구성원들 모두가 공유하는 의 의미가 있고 이 의미는 공동체 내의 협동작업을 거쳐서 형성되지만, 이러한 공유된 의미는 전문가 집단들이 갖고 있는 의미에 비해 모호하고 거칠다. 퍼트남에 따르면 한 단어의 의미는 사회언어적 협동을 통해서 결정되며, 그렇게 결정된 의미가 해당 단어의 외연 또한 결정한다.

  

   다음으로 퍼트남은 자연종 단어는 고정지시적이라는 중요한 주장을 펼친다. 크립키는 고유명사와 지시사가 고정지시적이라는 주장을 했는데, 퍼트남은 이러한 고정지시성을 자연종 단어들에게로 확장시키고자 한다. ‘’, ‘’, ‘호랑이와 같이 자연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사물들을 지시하는 단어들이 자연종 단어들이다. ‘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시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헬레니즘 시대에서의 의 정의, 1750년 경의 의 정의, 1950년 경의 의 정의는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트남은 이 세 시기 모두에서 이라는 단어는 동일한 외연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1950년의 사람들은 헬레니즘 시대의 아르키메데스가

와 유사하지만 정확하게는

가 아닌 유체를 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키메데스의 또한

를 외연으로 가진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종 단어들을 통해 자연 사물을 지시할 때 중요한 것은 그 단어들의 정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의 발전에 따라서 자연종 단어들의 정의는 끊임없이 변화해나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의의 차원에서만 따지자면 1890년의 전자1930년의 전자는 서로 상당히 다른 정의를 갖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시기의 전자 모두 동일한 대상을 외연으로 갖는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종 단어들을 통해 자연 사물들의 표면적인 성질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사물들의 숨겨진 구조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자연 사물들에 대한 정의가 불완전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정의를 통해 자연 사물들이 갖고 있는 (그 사물들 고유의) 숨겨진 구조를 지시하기 때문에, 이러한 지시 자체의 유효성은 고유명사의 지시가 그 자체로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 퍼트남의 주장이다.

  

   논평: 쌍둥이 지구의 사례에 대한 퍼트남의 해석이 옳기 위해서는, 지구인들이 이라고 말할 때 지시하는 사물들의 외연이 항상 고정적이고, 그와 동시에 쌍둥이 지구인들이 이라고 말할 때 지시하는 사물들의 외연이 항상 고정적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지구에서의 의 숨겨진(자연적인) 구조는

로 동일할 것이고 쌍둥이 지구에서의 의 숨겨진(자연적인) 구조는

로 동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는 해당 물질들의 숨겨진(자연적인) 구조를 의미하고, 이 두 물질의 서로 다른 숨겨진 구조를 구분하기 위해서 퍼트남이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퍼트남이 제시하는 가상적 상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특정한 시점에서 지구인들과 쌍둥이 지구인들이 동일한 수준의 물리화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가 서로 다른 물리적 성질을 갖고 있는 물질들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후의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따라서 이 두 종류의 물질이 실제로는 동일한 물질

에 기초한 두 가지의 표현형이라는 것이 밝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 퍼트남은 처음부터

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서로 다른 자연종 사물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학적 지식을 활용해야만 하며, 과학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 어떤 시점에서도 우리가 갖고 있는 과학이론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