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촘스키, [언어와 마음 연구에 있어서의 자연주의와 이원주의] 요약 정리

강형구 2016. 10. 10. 06:54

 

 

노암 촘스키(Noam Chomsky),언어와 마음 연구에 있어서의 자연주의와 이원주의

  

   촘스키는 이 논문에서 언어와 마음 연구에 있어서도 자연과학적 탐구방법을 적용할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현대 철학에서의 자연주의적 접근 방법이 실은 심적인 것심적인 것이 아닌 것을 구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자연주의가 아닌 이원주의라고 비판한다.

  

   그는 심적인 것’, ‘마음이라는 용어에 형이상학적 의의를 주지 않으며, 이 용어가 적용되거나 적용되지 않는 대상을 명확하게 구획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촘스키에 따르면 과학에서 과학자들은 과학적 탐구가 진행됨과 동시에 설명 혹은 이해에 대한 그들의 목적에 적합하도록 개념들을 발전시킨다. 촘스키는 이와 같은 과학적 탐구의 방법을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마음에도 적용하려 한다. 세계의 심적 측면들을 자연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입장이며, 이 입장은 방법론적 이원주의와는 구분된다. 우리가 언어와 마음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본질에 대해서는 파악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이에 대한 탐구를 충분히 신뢰할만한 수준으로 진행시켜나갈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다.

  

   촘스키에 따르면 마음에 대한 설명적 이론이 언어에 대한 연구에서 제시되었고, 이 연구는 방법론적으로 문제가 없다. 두뇌는 언어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물체로서의 인간에게는 순수한 언어능력이 내재되어 있고, 이 능력의 초기 상태가 외부적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현된다. 내적, 개체적, 의향적인 언어를 ‘I-언어’ L이라고 부르자. 이 때 언어능력은 L에 포함(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언어능력과 관련된 생물학적 계산 체계는 주어진 생물학적 자질로 인해 고정된 채로 불변한다. 실제로 인간이 보여주는 다양한 언어들 사이에는 특별한 차이가 없지만, 심층이 아닌 표층의 측면에서는 언어들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위와 같은 언어학적 성과에 대해서 철학자들은 비판을 가하고, 촘스키는 이러한 철학자들의 입장을 다시금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철학에서의 자연주의는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와 인식론적 자연주의로 나눌 수 있다. 마음, 지식, 언어에 대한 해명이 자연과학의 성과들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다. 현대의 인식론적 자연주의는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으로부터 유래하며, 콰인의 인식론은 행동주의적 심리학과 유사하다. 인간의 인지 과정에는 자연적으로 부과된 제약들이 있고, 그러한 제약들을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행위들을 통해 밝히려고 하는 인식론을 자연화된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최근의 진화론적 인식론도 이 부류에 속한다.

  

   17, 18세기의 인식론적 자연주의는 마음에 관한 경험적 이론을 수립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최근에 사용되고 있는 인식론적 자연주의는 17, 18세기의 인식론적 자연주의와는 다르다.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입장에서 전통적인 인식론적 자연주의는 표준적인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토대로 한 언어학에서는 어떤 사람 A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지적 상태에 어떻게 다다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하며, 이 현상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항들을 고려한다. 그리고 그 결과 언어습득장치(LAD) 이론과 초기상태이론인 보편문법(UG) 이론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기존의 과학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의 입장은 온당하지 않다. 만약 그러한 제약을 따랐더라면 뉴턴역학은 탄생하지도,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과학형성능력(SFF)이 문제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다. 성공적인 자연과학은 우리의 과학형성능력과 세계의 본성이 중첩되는 영역에 존재하며, 자연과학은 우리의 자연주의적 탐구가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의 측면을 다루는 것이다.

  

   근대 초기에 데카르트주의자들은 기계적 철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했지만, 언어의 표준적 사용이 기계적 철학에 부합하지 않자 마음이라는 새로운 원리를 도입했고 이에 따라 심신문제가 등장했다. 뉴턴이 원격힘인 중력을 도입하면서 데카르트의 물질 이론은 타격을 입었으며 그 결과로 심신문제는 사라졌지만, 새롭게 정의된 물질 및 몸의 이론과 더불어 심신문제는 다시금 등장했다. 라메트리, 프리스틀리 같은 사람들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 조직화된 물질의 특성들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에서도 인간의 언어 능력에 대해서는 만족스러운 이론을 제시하지 못했는데, 최근에 들어와서야 LAD, UG 이론의 등장으로 이 분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론적 성과가 있었다는 것이 촘스키의 생각이다.

  

   촘스키는 물질론을 주장하는 입장과 이를 비판하는 입장 모두를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기에 이 두 종류의 입장 모두 물질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해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론을 비판하는 토머스 네이글은 몸과 마음을 구분하고, 마음은 의식과 연관되는 반면 몸은 물리과학으로 기술 가능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네이글에 의하면 물질론적 입장은 심신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몸과 마음을 구분하는 것은 부당하다. 19세기 말에 분자는 비물리적이고 허구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게 된 것처럼, 지금 물리적인 것이 아닌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훗날 물리적인 것이라고 판단될 여지는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적인 것 또한 예외는 아니다. , 심적인 탐구가 물리적일 수 없다고 처음부터 배제해서는 안된다.

  

   데이빗슨은 합리성, 이성, 의향 등과 같은 개념들의 선험적인 성격 때문에 통속심리학은 통속역학, 통속화학과는 다르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영역이 다르다고 해서 그 둘 사이의 관계가 무법칙적이라고 결론내릴 필요는 없다. 데이빗슨의 말대로 심적으로 기술되는 사건들과 물리적으로 기술되는 사건들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법칙이 없다면, 이는 물리적으로 기술되는 사건들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자연주의적 탐구의 대상은 통속적인(일상적인) 개념 혹은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에서 말하는 물리적인 것심적인 것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으며, 과학에서는 일상적인 담론에서 등장하는 심적혹은 물리적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네이글은 LAD가 물리적인 것에 대한 이론일지 몰라도 심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 또한 경험적이며 그 타당성을 따질 수 있다고 촘스키는 생각한다. 콰인의 경우 쿼크 등은 과학이라고 생각하지만 LAD는 과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이에 대한 특별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촘스키에 따르면 콰인 또한 일종의 방법론적 이원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의식에의 접근이라는 관점에서 심적인 것을 특성화시키려는 시도(특히 써얼에 의해서)가 있다. 언어의 문법적 특징이 언어사용자에게 의식적으로 감지되지 않기 때문에 언어습득장치 이론과 보편문법 이론은 심적인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밋의 경우 과학과 철학을 구분하면서 의미를 규명하는데 있어서는 별도의 철학적 설명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써얼은 의식에로의 접근에 기초해서 심적인 것과 심적이 아닌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구분하려 하며, 콰인의 맞추기따르기구분도 이와 유사한 구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촘스키에 의하면 이러한 구분은 별 의미가 없고 불필요하다.

  

   간략한 논평: 과학이론의 역사를 보면 일반 사람들이 갖고 있던 일반적인 상식을 뒤엎은 이론들이 많이 등장했고, 이러한 이론들이 이후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냈음을 알 수 있다. 상식과 직관에 근거한 과학이론에 대한 비판은 과학사적으로 근거가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상식과 직관에 호소해 심적인 것과 심적인 것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데 반대하는 촘스키에 동의한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촘스키가 말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기반한 언어학 이론이 얼마나 좋은 과학이론인지를 따져야 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과연 이 이론은 물리학 만큼의 설명력과 예측력을 갖고 있는가? 과연 심적이고 언어적인 것에 대한 과학적 이론의 타당성을 공정하게 판가름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잣대가 존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