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

강형구 2016. 10. 8. 22:45

 

   잘 지내셨습니까, 김선생님? 저는 대한민국에서 과학철학(科學哲學, philosophy of science)을 공부하고 있는 35살의 학생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겨우겨우학생입니다. ‘겨우겨우대학에 들어갔고요, ‘겨우겨우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겨우겨우석사 논문을 썼고, ‘겨우겨우박사과정 수업 수강을 최근에야 마쳤습니다. 학부, 석사, 박사과정 학점 이수규정도 겨우겨우충족시켰습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이후 저는 제가 소속되어 있는 집단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학교에 소속되어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모범생이 아닌 우둔하고 평범한 학생일 뿐입니다.

  

   우둔하고 평범한 학생이라도 스스로가 원하면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에, 저는 제가 누릴 수 있는 그 권리를 갖고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학점을 이수한 다음에는 논문을 써야 졸업을 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선 저는 논문을 쓸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한 시험을 준비하기로 하였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철학과에서 시행하는 시험에서 통과해야 하고, 저의 지도교수님께서 주관하시는 과학철학 종합시험에서도 통과해야 합니다. 저는 철학과에서 인식론 분야와 논리 및 언어철학 분야 시험을 치를 예정입니다. 인식론, 논리철학, 언어철학을 공부한 지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그래도 시험이니 어쩌겠습니까? 시험공부를 해서 시험을 치르고 시험을 통과해야지요.

  

   학부 시절부터 나름 철학을 공부해왔지만, 아직까지도 철학문헌은 저에게 낯설고 어렵습니다. 특히나 영어로 된 문헌은 더욱 낯설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논문자격시험을 치르기 위해 영어로 된 문헌들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직장에 다니는 주중에 글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시간인데, 지하철 안에서 영어로 된 글들을 읽으면 잘 이해도 안 되고 기억도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방법은 영어로 된 문헌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입니다. 물론 이 방법을 사용하면 논문자격시험 준비 기간은 한없이 길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기간이 길어져도 제게 큰 문제는 없습니다. 저는 더 이상 공식적인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학사, 석사학위가 있는데 박사학위 말고 무슨 다른 학위가 필요하겠습니까.

  

   어쩌면 철학과목 논문자격시험을 준비하는 데 1년 정도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후에는 과학철학 종합시험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 또한 1년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네요. 시험 전후로 소모될 기간까지 합하면 2년 반 정도 걸리겠지요. 게다가 한 번에 시험에 붙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저는 시험통과에 3년 정도 걸리리라 예상합니다. 시험에 턱걸이로 붙으면 학위 논문을 써야겠지요. 훌륭하고 뛰어난 논문을 쓰는 것은 전혀 바라지도 않습니다. 남은 5년 동안에 논문을 써낼 수 있고, 그 논문이 통과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올해 겨울에 아내와 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니,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 저는 박사학위를 받게 되겠지요.

  

   ‘겨우겨우박사학위를 받아도 좋습니다. 그래도 우리 아이에게 박사 아빠가 되어주는 건 제법 좋은 일일 것 같아요.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 제 삶이 어떻게 될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박사가 된 후에도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 계속 다니고 있을까요? 아니면 과학철학 연구에 헌신하기 위해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될까요? 지금으로서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이것은 분명합니다. 저라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 있든, 계속 과학철학을 읽고 그것에 대해 고민하며 글을 쓸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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