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회고

강형구 2016. 10. 19. 23:09

 

   나는 1982년생이다. 이는 내가 한국에서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렀음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은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최악의 물수능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만큼 시험이 쉬웠다는 뜻이다. 그러나 물수능이었다는 사실이 2001년 시험을 치렀던 학생들을 비판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당시의 시험을 출제한 것은 학생들이 아니라 교육부와 교육과정평가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물수능이 아니라 나라는 개인이 경험했던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기억해보고자 이 글을 쓴다.

  

   나는 19997월에 부산과학고등학교(현 한국과학영재학교)를 그만두었다. 과학고등학교의 주입식 과학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과학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사실 고등학교에서 읽었던 책들이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존 로제의 [과학철학의 역사], 하워드 이브즈의 [수학의 기초와 기본개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 같은 책들을 읽으면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역시 고등학교 때 읽었다. 나는 과학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철학과에 가고자 했고, 우리나라 대학에서 철학과는 인문계열에 속해 있어 과학고등학교에서 대입 시험을 치르기는 곤란했다.

  

   하지만 나는 전학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전국 대부분의 과학고등학교에서는 1년 반 만에 모든 교과과정을 다 배웠다. 그래서 내가 학교를 그만둘 당시에는 진도로만 보면 이미 고등학교 교과과정을 다 배운 상태였다. 과학고등학교에서는 한국과학기술원과 같이 과학특성화대학에 진학할 학생들은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대학으로 진학했고, 나머지 학생들은 고등학교 3학년 내내 입시공부에 매달렸다. 어차피 고등학교에 남아 있으면 남은 기간 동안 입시공부에 매달릴 것이 뻔했다. 그래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인문계열 대입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나는 고등학교를 중도에 그만 두었다.

  

   1999년 여름 이후 나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공부했다. 부산의 도서관 곳곳을 돌아다니며 입시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읽고 싶은 과학책과 철학책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학능력시험 모의고사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학원을 알아보던 차에 나처럼 과학고등학교를 그만 둔 친구들이 들어간 대학입시학원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친구들은 1999년에 학교를 그만 둔 직후 따로 반을 만들어서 학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2000년 초에야 입시학원에 들어갔고, 고등학교 친구들과 같은 반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친구들은 최상급 반에 속해 있었던 반면, 나는 친구들보다 한 단계 수준이 낮은 반으로 들어갔다. 게다가 나는 이과가 아니라 문과였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섞여 공부했다.

  

   학원 입학 초기에는 수학능력시험 모의고사 성적이 360점대 중반이었다. 그러나 나는 성적에 신경 쓰지 않고 꾸준히 공부했다. 1년만 참고 견딘다는 마음으로 학원에서 내어주는 문제집들은 꼬박 꼬박 다 풀었다. 밤에도 늦게까지 무리하지 않고 정확히 밤 10시까지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입시학원인 까닭에 학원에서는 형이나 누나들이 종종 서로 어울려 놀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가끔씩 영화를 보러 시내에 나가거나 책을 구경하러 도서관이나 서점에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하루에 정해진 공부를 끝내면 입시공부가 아닌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읽었다. 나로서는 입시공부가 학생으로서 해야 하는 의무였을 뿐이었다.

  

   꾸준히 공부하다 보니 모의고사 점수는 계속 올라갔다. 4~5월 즈음에는 370점에서 380점으로 올랐고, 7월이 지나자 390점 근방까지 올랐다. 8월 이후에는 계속 390점을 넘겼고, 수학능력시험 직전에 치른 모의고사에서는 396점을 받았다. 모의고사 점수가 올라가도 철학과로 진학하겠다는 나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나의 그러한 생각을 무척이나 걱정하셨다. 과연 철학과로 진학해서 어떻게 먹고 살 것이냐는 걱정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수학능력시험 전날에는 긴장이 되어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시험 날이 되자 생각보다 시험이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 시간 내에 여유롭게 문제들을 다 풀었다. 마지막 제2외국어 시험에서는 시간이 너무 남아서 몇 번 검토해보고는 잠을 잤다. 시험이 너무 쉬워서 오히려 불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험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쉬었다. 밤이 되어서야 수학능력시험 풀이를 찾아서 점수를 매겨보았다. 확인 결과 언어영역에서 1, 수리탐구영역에서 1, 사회탐구 및 과학탐구영역에서 1, 외국어영역에서 1개를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4개 영역에서 각각 1문제씩 틀린 것이다. 특히 수학에서는 계산 실수를 했고, 영어에서는 문제를 잘못 읽는 실수를 했다. 하지만 실수는 나 스스로가 저지른 것이었고 나 이외의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2외국어영역을 제외하고 나는 400점 만점에 392.5점을 받았다. 나로서는 실수가 아쉽기는 했지만 그 정도면 만족할 만한 점수였다. 나는 철학과가 포함되어 있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인문계학과군(국사, 서양사, 동양사, 철학, 종교, 미학, 고고미술사학)에 정시 지원해서 논술시험과 면접시험을 거쳐 최종 합격했다.

 

    나의 기억으로 면접시험에서 나는 면접관인 교수님들 앞에서 러셀, 화이트헤드, 아인슈타인 등을 얘기하면서 과학철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대학 입학 후 선배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나는 과학철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고, 입학 직후인 대학교 1학년 1학기부터 자연과학대학의 교양수업들을 수강했다. 아마도 나는 물리학과 장회익 교수님의 수업, 화학과 김희준 교수님의 수업을 수강했을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서 좋았던 것은 더 이상 입시에 매달리지 않고 읽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2001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나에게는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피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나는 그 도전에 떳떳하게 맞섰고, 그 결과로 대학에 진학해서 과학철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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