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어떤 현실인식

강형구 2016. 10. 7. 15:30

 

 

   추석 연휴 때 부모님, 아내와 영화 [밀정]을 보고 난 후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는 1945년에 끝났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학문적으로도 독립을 한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아직까지 학문적으로 식민지 상태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물음이 시작된 이후 나는 일제 식민시대와 현재의 학문적 상황을 비교하면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학문적 식민지 혹은 학문적 후진국에서는 학문체계를 선진국으로부터 차용한다. 실제로 우리나라도 그렇다. 고등교육기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 우리나라의 많은 똑똑한 학생들은 학문적 선진국(미국, 영국 등)으로 유학을 떠나 학위를 받아온다. 학위를 받은 다음에는 대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우리나라의 대학에서 교수 직위를 얻은 후 독창적인 연구를 하고 제대로 제자들을 육성하며 독자적인 학문적 전통을 만드는 경우는 드물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이런 전통은 아주 소규모로 지속되거나, 지속되더라도 금방 사라지고 있다.

  

   왜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능력이 출중한 대학원생들이 국내에서가 아니라 국외에서 학위를 하고 오는 것일까? 사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미국의 똑똑한 학생들은 학문이 발전해 있는 유럽과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거나 공부를 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미국이 세계 학문의 중심이 된 이후 미국 학생들은 굳이 유학을 갈 필요가 없어졌다. 미국 내에서도 충분히 세계 정상급의 연구자 아래에서 연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모든 분야에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기초과학 분야에서 일본은 고유의 연구 전통을 형성해낸 것 같다. 노벨상을 수상한 수준급의 연구자들이 일본에 있고, 뛰어난 일본 학생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계속 연구해도 충분히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 특유의 정치경제적 역사로 인해 우리는 아직까지 미국이나 일본처럼 학문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식민지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서 비판하기보다는, 이와 같은 상황을 우리 스스로가 충분히 명확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극소수의 몇몇 전문분야를 제외하고, 수학, 물리학 등 기초과학 분야나 철학 같은 인문학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아직까지 식민지 상태에 머물러 있다. 만약 학부를 졸업하고 계속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을 군인으로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연구자들은 정식 군대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군에 소속되어 있는 군인들과도 같다.

  

   일제 식민시대에 독립군의 처지는 어땠을까? 그야말로 비참하고 참담했을 것이다. 수적으로 압도적인 열세에 처해 있고 무기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해보려고 하면 곧바로 강력한 일본군에 의해서 진압된다. 세력을 모아 큰 전투를 치러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도 거의 없다. 너무나 암울한 전망이 눈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으로, 비굴하게 사느니 당당하게 죽자는 생각으로 젊은이들은 독립군에 뛰어든다. 그렇게 독립군의 전통은 이어진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비유를 다양하게 확장시켜볼 수도 있다. 일제시절 외국에서 신식 군사훈련을 받은 후 독립군을 조직한 사람이 있었던 반면, 조국으로 돌아와 일본군으로 활동한 사람도 많았다. 상당한 고뇌 후에 독립군을 조직하고자 결심을 한 사람이 있었지만, 독립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식민지 조선에서 식민지 관료로서 살아간 사람들도 많았다. 이 비유에서 연구자인 우리 자신은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까. 한 번 쯤 생각해 볼 만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일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서일기  (0) 2016.10.15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  (0) 2016.10.08
평범하고 단조롭고 낙천적인  (0) 2016.09.24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기  (0) 2016.09.18
2016년 추석 연휴  (0) 2016.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