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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의 차이

토머스 쿤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읽은 이후, 신칸트학파에 속했던 하인리히 리케르트의 [문화과학과 자연과학]을 읽었다. 독서 초반에는 책을 읽어내기가 다소 힘이 들었다. 번역의 문제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책의 문장들은 정확하고 읽기 쉽게 번역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양식과 문체였다. 한동안 잘 접하지 못했던 긴 문장과 긴 문단이 이어졌고, 구체적인 사례 분석보다는 정교한 개념 분석에 방점을 둔 서술이 이어졌다. 이렇듯 낯선 것에 적응하는 것에는 늘 그랬듯 시간이 좀 걸렸다. 편한 마음으로 인내심을 갖고 읽다보니 조금씩 양식과 문체에 적응이 되었다. 나는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몇 번 했다. 수학과 과학에 대한 교과서적인 설명만을 읽던 내게 아인슈타인의 글과 하이젠베르크의 글은 일종의 신선한 ..

일상 이야기 2016.05.27

한스 라이헨바흐, [원자와 우주] 10: 열적 과정의 기본 입자, 분자

Ⅲ. 물질 10. 열적 과정의 기본 입자: 분자 우리 눈에 매끄럽고 단단하게 비친다고 하더라도 모든 물체는 내부적으로 무수히 많은 작은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 즉 물체는 알갱이들로 구성되고 알갱이들 사이에는 틈이 있다는 생각의 기원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생각이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서 충분히 발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생각은 그 이후의 과학 발전 과정에서도 살아남아, 19세기 초에 이르면 이 생각은 완전히 새롭고 더 심오한 방식으로 정당화되는 과정을 겪는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믿음은 분명 뿌리 깊고 강한 근원을 가질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사실 물질의 원자 이론으로 이끄는 개념들은 가장 기본적인 현상들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

한스 라이헨바흐, [원자와 우주] 09: 빛의 물질적 특성

9. 빛의 물질적 특성 지난 장에서 살펴보았듯 빛 파동의 전기적 본성을 증명하는 실험을 했던 하인리히 헤르츠는 1899년에 열린 자연과학자들의 하이델베르크 협의회에서 대담한 표현을 사용하며 강연을 했다. “빛이란 무엇인가? 영과 프레넬의 시대 이후 우리는 빛이 파동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빛 파동의 속도를 알며, 파장을 알며, 빛 파동이 횡파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빛 파동 운동의 기하학적 조건들에 대해 충분히 친숙해졌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의심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빛의 파동 개념을 논박하는 것은 물리학자에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적으로 말해, 빛의 파동 이론은 확실하다.” 지난 세기 말까지 물리학자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빛의 파동 이론과 관련된 ..

한스 라이헨바흐, [원자와 우주] 08: 빛의 전기적 특성

8. 빛의 전기적 특성 파동 이론과 입자 이론이 경쟁하고 점차적으로 실험 결과들이 축적되면서 파동 이론이 승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파동 이론만이 이론적인 개념들을 사용하여 거울, 격자(grating), 망원경, 현미경 등을 이용한 복잡한 실험 장치들로부터 얻은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이 이와 같은 상태의 지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에테르 이론을 통해 파동 관념에 대한 정당화를 추구했던 것은, 사실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된 이론을 좀 더 포괄적인 이론으로 설명함으로써 설명을 좀 더 심오하게 만들고자 했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설명하는 것, 이해하는 것은 다양한 사실들을 하나의 일반적이고 통합된 개념으로 종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파동 이론의 설명은 그 시대의 가장 ..

한스 라이헨바흐, [원자와 우주] 07: 빛의 파동적 특성

7. 빛의 파동적 특성 광선의 형태로 전파되고 다양한 색깔들로 분리된다는 것은 빛의 기초적인 속성들이며, 이는 빛에 대해서 최초로 탐구되고 정립된 사실들이었다. 이후 빛에 대한 좀 더 심오한 물음들이 제기되었는데, 이 물음들은 인류로 하여금 앞서 언급된 빛에 관한 사실들 너머로까지 나아가게 해 주었다. 그것은 바로 빛의 내재적 본성에 관한 물음이었다. 빛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이 물음을 “빛”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적용해서는 안 되며, 물리적 행위자로서의 “빛”에 적용해야 함을 살펴보았다. 이 물음은 외부 세계와 관련되며, 감각으로서의 “빛”이 우리의 망막에 발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 물음에 답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빛의 속성들을 연구하는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그러한 연구..

역사적 관점의 장점과 위험

토머스 쿤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정동욱 역)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개념들을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두 저서 사이의 관계는 더욱 각별하게 여겨진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체계는 헬레니즘 시대에 등장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전통을 상당 부분 유지하면서도 그에 비견될 정도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천문학 체계였다. 비록 천문학 외적인 요소들이 상당 부분 개입하고 그런 외적 요소들이 천문학 체계 자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상당부분 기여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천문학 체계가 존재했고 그 체계가 세계에 대한 관측 자료들과 잘 들어맞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천문학은 고도로 정교화 된 개념 체계였고, 하나의 장대한 전통을 이루고 있었다..

일상 이야기 2016.05.22

독서하는 시간

요즘에는 라이헨바흐의 [원자와 우주] 번역을 끝내고 난 후 잠시 쉬어간다는 생각으로 여유 시간에 번역 대신 독서를 한다. 피터 고드프리스미스가 지은 [이론과 실재]를 읽었고, 신광복·천현득 선배가 지은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지금은 토머스 쿤이 지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정동욱 선배 번역)을 읽고 있다. [이론과 실재]는 실재론적 경험주의(혹은 경험주의적 실재론)를 옹호하는 저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번역된 문장들이 깔끔하지 못한 경우가 더러 있어 다소 아쉬웠다. [과학이란 무엇인가]는 과학방법론과 과학적 설명에 대한 기존의 과학철학적 논의를 아주 간결하고 명료하게 정리해 놓은 책이어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읽으면서 이 책이 아주 좋은 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일상 이야기 2016.05.20

한스 라이헨바흐, [원자와 우주] 06: 빛의 광선적 특성

Ⅱ. 빛과 방사 6. 빛의 광선적 특성 과학적 탐구는 항상 일상생활의 견해들 및 물음들과는 특정한 대조를 이룬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해 매 순간 해야만 했던 일들은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더 이상 그 일들을 문제로서가 아니라 궁극적인 사실들로 받아들이며, 과학의 임무란 모든 다른 현상들을 이러한 가장 단순한 사실들로 환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물이 축축한 것, 빛이 밝고 색깔을 띠며 사물들에 그림자를 형성하는 것 등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사실들이다. 우리가 이러한 가장 단순한 사실들을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이 사실들을 탐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과학적 비판 정신이 어느 정도 성숙해야만 한다...

서울 출장을 다녀오며

오늘 나는 한국능률협회컨설팅(KMAC)이 주관하는 공공기관 성과관리 세미나 참석차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 여의도에는 한국을 움직이는 굵직한 기관들이 밀집해 있어, 여의도에 도착하니 대구에서 생활하는 나로서는 우리 사회의 심장부로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나는 노무현 정부 때부터 추진했던 공공기관 지방이전 정책에 동의했고, 국가의 주요 기능들이 수도권에만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확실히 우리나라에서 서울은 다른 지역과는 크게 차별화되어 있다. 서울에 온 내가 스스로를 중앙이 아닌 지방 시민이라고 강하게 의식하는 것을 봐도 그러하다. 한 나라의 수도가 특별할 수밖에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의 공공기..

과학관 이야기 2016.05.13

헴펠, [과학적 설명에서의 법칙과 그 역할] 요약 정리

헴펠, 「과학적 설명에서의 법칙과 그 역할」 과학적 설명에 있어 기본이 되는 두 가지 조건 물리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주요한 목적들 중의 하나다. 우리는 과학적 설명의 특징(character)이 무엇이고 이 설명이 우리에게 어떤 통찰(insight)을 주는지 살펴보자. 과학적 설명은 다음과 같은 두 조건(requirement)을 만족해야 한다. 그 첫 번째는 ‘설명적 유관성(explanatory relevance)’의 조건이다. 그 두 번째는 ‘시험 가능성(testability)의 조건’이다. 무지개가 어떤 광학 법칙에 기초해서 어떤 특정한 상황일 때 발생하는지를 설명하는 물리 이론의 경우, 우리는 이 이론을 기초로 해서 다른 특정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에도 무지개가 발생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