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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의 데이트

한창 여름방학 기간이다. 아내와 내가 맞벌이를 하는 까닭에 여름방학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 1학년 큰딸은 학교 돌봄교실에 다니고 있는데, 이번 주는 학원들마저 방학이라 오늘 오후에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반차를 쓰고 딸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우선 퇴근한 뒤 집에 도착해서 설거지를 한 후 딸의 학교 근처로 가서 아이를 태워 내가 평소에 다니는 카페에 왔다. 카페에서 나는 노트북을 펴서 번역 원고를 정리하고, 딸은 눈높이 교재(국어, 수학, 한자)를 푼다. 우리는 복숭아 스무디와 블루베리 요거트를 시켜 맛있게 마신다. 최근 나는 “기본”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기본적인 사항들만 잘 지켜도 무난하게 살 수 있다. 예를 들어 직장 생활을 생각해보자.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이라면, 출근 시간에..

일상 이야기 2023.08.01

베트남 하노이의 기억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다녀왔다. 2023년 아시아태평양 과학철학회(APPSA) 학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학술대회 발표 신청을 한 나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왜냐하면 정말 나로서는 물리적으로 발표 준비를 할 시간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7월 1일자로 복직한 이후 직장에서는 새로 맡게 된 업무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집에 돌아오면 애들 보고 집안일 하느라 바빴다. 그렇다고 이미 발표하기로 된 것을 취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발표 전날의 늦은 밤에 겨우 발표 자료를 담당자에게 메일로 보낼 수 있었다. 발표할 때도 부족한 영어 실력 때문에 퍽 버벅거렸고, 내가 질문자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주어진 발표를 펑크내지 않고 무사히 끝냈다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

일상 이야기 2023.07.23

저 들풀처럼 하루하루 산다는 것

내가 유일하게 보는 드라마는 KBS 주말드라마인데,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는 “진짜가 나타났다”이다. 어제 저녁 가족들과 함께 드라마를 보다가 감명 깊은 대사가 나왔다. 극 중 여주인공은 헤어진 전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임신했지만, 아이를 지우지 않고 낳기를 결심했다. 그녀는 때마침 하기 싫은 결혼을 피하고 싶던 남주인공을 만나 그와 위장으로 결혼한 후(당연히 혼인 신고는 안 한다)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데, 결국 여주인공은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남주인공의 아이가 아님을 남주인공의 가족들에게 밝힌다. 여주인공의 어머니는 남주인공의 집까지 찾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한 후, 여주인공을 데리고 집으로 와 작은 화단에 심은 꽃들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연두야, 괜찮다. 저 꽃들이 ..

일상 이야기 2023.07.16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나는 다시 국립대구과학관의 연구원으로 돌아왔다. 1년 6개월만의 일이다. 그동안 제법 많은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전공한 이학박사(Ph.D.)가 되었다. 석사일 때는 나 스스로를 ‘연구자’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박사학위를 갖고 나니 이제는 나 스스로를 정식적인 ‘연구자’라 생각하게 된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전공한 연구자가 ‘대학’이 아닌 ‘국립과학관’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2017년부터 2023년까지 전시기획연구실 소속 연구원으로서 과학기술자료 수집, 조사, 연구, 전시 업무를 담당했다면, 나는 올해 7월부터 교육연구실 소속 연구원으로서 과학관 개인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국립과학관은 국가가 운영하기는 하지만 학교보다는 훨씬 더 수요자의 니즈에 초점을 맞춰 ..

과학관 이야기 2023.07.12

명상 음악을 들으며

나는 2023년 7월 1일부로 1년 6개월간의 육아휴직을 끝내고 직장으로 복귀했다. 아내 또한 직장 생활을 하는 중이기에(우리는 같은 직장의 다른 부서에서 근무한다), 나는 정시 출근하며 쌍둥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후 정시에 퇴근하고, 아내는 첫째의 등교 시간에 맞춰 정시보다 30분 일찍 출근한 뒤 정시보다 30분 일찍 퇴근하면서 어린이집에서 쌍둥이들을 하원시킨다. 나와 아내 모두 퇴근하면 집에 와서 본격적인 집안일 시작이다. 다행히 부모님, 장모님께서 수시로 집안일과 육아를 도와주셔서 겨우 버틸 수 있다. 우리 가족에게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무사히 살아내는 것’이 중요한 시기다. 지난 1주일 동안 긴장하며 바쁘게 지냈다. 특히 새로운 부서에 발령되어(교육연구실)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느라 바빴다. 그..

일상 이야기 2023.07.08

등산의 교훈

어제는 오래간만에 금정산 등산을 했다. 내가 자주 다니던 코스, 즉 부산 명륜동에서 출발해서 금강공원 입구를 거쳐 케이블카 종착지까지 간 후, 휴정암을 거쳐 동문과 북문을 지나치며 범어사까지 가는 코스를 밟았다. 이번에는 대략 6시간 정도 걸렸는데, 왜냐하면 중간에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이다. 휴정암에 도착한 이후 동문으로 가는 길에서 길을 잃어 부산대학교 위쪽에 있는 보광암과 호국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길에서 많이 긴장하면서도, 대략적인 방향을 염두에 두고 산행하며 계속 걷다 보면 길이 나올 것이라 믿었다. 휴대전화의 지도 앱은 사용하지 않았다. 결국 친숙한 길을 다시 찾게 되자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을 걷는 것은 아주 편한 일이다. 그러나..

일상 이야기 2023.07.02

러닝메이트, 혹은 선의의 경쟁자

내가 한국장학재단에 다니면서 기획재정부에서 파견 근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장학재단에서 본부장을 1명 외부 공모하는데, 기재부 출신의 서기관급 직원 2명이 지원한 상황이라 했다. 나는 그 2명 중 1명과 우연히 잠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께서는 자신을 일종의 ‘러닝메이트’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볼 때 그분의 이력은 상당했고 매우 경쟁력이 있는 공무원이었다. 비록 최종적으로 선발되는 한 사람이 ‘주인공’이겠고 결국 내가 대화했던 그분은 주인공을 위한 ‘러닝메이트’로 남겠지만, 나는 그때 ‘러닝메이트’조차도 상당한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는 ‘제발 졸업만 좀 하자’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과학철학 연구에 더욱더 재미가 붙었..

후생가외(後生可畏)도 파이팅 있게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 중에 ‘연하남’이 있다. 실제로 ‘연하남’의 유튜브 영상들은 작년에 내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큰 도움이 되었고,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도 나는 그의 영상들을 수시로 보고 들으면서 큰 자극을 받는다. ‘연하남’은 사회과학 중의 한 분야를 전공하고 있는 듯 보인다. 내가 인문학을 폄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사회과학 연구자들은 이른바 ‘파이팅’이 인문학 연구자들보다 전반적으로 좀 더 강하지 않나 싶다. SCI급 논문들을 팀을 이루어 협업해서 쓴다든지, 정성적인 분석보다는 정량적인 분석을 기본으로 하는 모습을 봐도 그러하다. 또한 ‘연하남’은 포기하지 않고 근성 있게 도전하고 늘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려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참으로 배울 만하다. 내 추측에 ..

일상 이야기 2023.06.24

성실은 성공이 아닌 생존의 조건

지금까지 41년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 비교적 분명하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다. 내가 머리가 좋은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머리가 나쁘지 않다는 것은 비교적 분명해 보이지만,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머리가 좋은지는 전혀 확실하지 않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이룬 것은 대부분 뛰어난 지성보다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요구하는 일들이었지, 특출난 지적 능력을 요구하지는 않는 일들이었다. 어쩌면 성실함은 내게 일종의 ‘생존 전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에 대한 나의 과도한 애정은 제3자의 객관적 관점에서 보면 나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은 일종의 ‘일탈’이었다. 내게 물리학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없었다면 나는 과학고등학교로 진학하지 ..

일상 이야기 2023.06.20

겸손함, 기본에 충실하기,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사실 과학철학 연구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다.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과학사 혹은 과학철학을 강의하고,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몇몇 주제들에 대해 연구하여 논문을 쓰고 투고하는 것이 연구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듯 내게는 좁은 전공 분야를 넘어서서 다른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나는 우리 사회의 숱하게 많은 구성원 중 하나일 뿐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소소한 일들을 하는 것일 뿐이다. 연구자라고 해서 무엇인가 대단하고 거창한 것은 별로 없다. 물론 어떤 영역에서든 군계일학의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있다.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김연아는 아니며 축구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모두 손흥민은 아닌 것처럼, 과학철학 연구를..

일상 이야기 2023.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