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러닝메이트, 혹은 선의의 경쟁자

강형구 2023. 6. 28. 09:54

   내가 한국장학재단에 다니면서 기획재정부에서 파견 근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장학재단에서 본부장을 1명 외부 공모하는데, 기재부 출신의 서기관급 직원 2명이 지원한 상황이라 했다. 나는 그 2명 중 1명과 우연히 잠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께서는 자신을 일종의 ‘러닝메이트’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볼 때 그분의 이력은 상당했고 매우 경쟁력이 있는 공무원이었다. 비록 최종적으로 선발되는 한 사람이 ‘주인공’이겠고 결국 내가 대화했던 그분은 주인공을 위한 ‘러닝메이트’로 남겠지만, 나는 그때 ‘러닝메이트’조차도 상당한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는 ‘제발 졸업만 좀 하자’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과학철학 연구에 더욱더 재미가 붙었다. 책과 논문을 읽으며 내 머릿속에서 비교적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조금씩 떠오르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논문을 써서 학술지에 투고했을 때 게재되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겨우겨우 박사학위를 받고 나니 과학철학 연구자로서 더 성장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대학에서 강의하고, 계속 연구논문을 써서 학술지에 게재도 하게 되니까, 어쩌면 나도 실력 있는 과학철학 연구자의 ‘러닝메이트’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이름 붙이기의 기술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을 ‘러닝메이트’라고 볼 수 있지만, 같은 상황에 대해 약간 부정적으로 ‘들러리’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들러리’라는 이름보다는 ‘러닝메이트’ 혹은 ‘선의의 경쟁자’라는 이름을 더 선호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과학철학 연구자 수는 적으며, 결국 소수의 과학철학 연구자들은 상대방을 일종의 선의의 경쟁자라고 생각하면서 서로 도와주고 성장시켜 주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일종의 ‘태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같은 상황이라도 치열한 전투 속에서 나 아닌 모든 사람을 ‘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반면에, 서로를 훌륭한 스파링 상대라고 생각하며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 반드시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박사학위 취득 이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국제 학술대회에 참가할 기회가 있을 때는 별다른 고민 없이 발표 신청을 하고 있으며, 국내 대학에서 게시하는 과학사 및 과학철학(과학기술학) 전공자 채용 공고들에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과학철학 저술 번역도 계획대로 충실하게 진행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과학철학 연구자로서의 활동을 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지만, 이 모든 과정을 일종의 ‘훈련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도전하고 준비하고 실제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계속 연습하지 않으면 잘하게 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현재로서 나는 이렇게 열심히 연구하면서 내가 쟁쟁한 상대방을 위한 멋진 ‘러닝메이트’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렇게 나 자신을 일종의 ‘러닝메이트’라고 생각하고 훈련하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영어 논문도 필요하고, 영어로 강의하는 것을 연습하는 일도 필요하다. 연구 주제가 너무 편협한 것에도 문제가 있으며, 오늘날 우리 사회가 주목하고 있고 필요로 하는 다양한 주제들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할 필요도 있다. 물론 여기서도 ‘중심 잡기’ 혹은 ‘절충’이 중요하다. 나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적절한 수준에서 외부적 자극을 수용하는 일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속 도전하고 부딪치고 교정해가는 가운데에서 조금씩 더 탄탄한 러닝메이트로 성장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대표의 훌륭한 스파링 상대가 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은 훌륭한 스파링 상대가 되려고 한다. 스파링 상대이지만 적은 아닌, 훌륭한 러닝메이트이자 선의의 경쟁자가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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