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학술대회 발표 준비

강형구 2023. 5. 28. 12:03

   만약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시간과 공간 질서가 빛 신호(세계에서 가장 빠른 신호)를 통해서 수립될 수 있고, 특히 이렇게 빛 신호를 통해 수립되는 사건들 사이의 위상적 관계가 계량적 관계와 달리 기준계와 무관하게 불변한다면, 우리는 눈을 떠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 세계의 객관적인 시간과 공간 질서를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는 인과적 영향들로 가득 차 있다. 내게 빛 신호를 보내고 있는, 그래서 내가 시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사건은 나에게 인과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과성만으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설명할 수 없나?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원인은 원인이 되어 결과를 초래하는 것일까? 아니면 원인과 결과가 있을 뿐이며 시간은 그와 같은 인과 관계에 수반되어 나타나는 것일까?

 

   올해 6월에 나는 한국과학철학회 연례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기로 했는데, 그 주제가 라이헨바흐의 1925년 논문 “세계의 인과적 구조와 과거와 미래 사이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다. 결정론적 관점에서 보면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특정 시점에서 전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의 위치와 운동량을 알 경우, 운동 법칙을 이용해서 이들의 향후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고 이들의 과거 움직임 또한 동일하게 후측(retrodict)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갱신되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와 미래 모두 미지의 세계처럼 여겨진다. 바로 그 점에서 과거와 현재는 대칭적인 것 아닐까? 그게 아니라는 게 라이헨바흐의 주장이다. 현재로부터 과거를 추론하는 것과 현재로부터 미래를 추론하는 것 사이에 객관적인 차이가 있으며, 바로 그 차이가 과거와 미래의 구분을 객관적으로 만든다. 그러면 여기서 등장하는 ‘추론’으로부터 주관적인 요소를 뺄 필요가 생긴다. ‘추론’을 두 사건 사이의 확률 관계로 대체하고, 그 확률 관계를 객관적으로 정의할 필요가 생긴다.

 

   A 사건이 발생했다, B 사건이 발생했다, A 사건이 발생했을 때 B 사건이 발생했다, B 사건이 발생했을 때 A 사건이 발생했다, 등의 표현은 최대한 시간의 흐름을 언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술된다. 사건들의 유형, 사건들의 발생 여부, 두 유형의 사건들 사이의 독립성 혹은 의존성 등을 우리가 객관적 파악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무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A 사건 또는 B 사건으로부터 그 공통의 원인이 되는 C 사건을 추론하는 것과, A 사건과 B 사건이 결합하여 만들어 낼 미래의 C’ 사건을 추론하는 것 사이에 객관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객관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결정론에 따르면, A 사건과 B 사건으로부터 그 두 사건의 공통 원인이 되는 C 사건을 추론하는 것과, A 사건과 B 사건으로부터 두 사건의 결과가 되는 C’ 사건을 추론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 학술대회 발표 준비를 계기로 다시 시간의 문제를 생각한다. 경험주의 관점을 취하는 내게는 비시간적인 우주를 생각하는 것은 다소 이상하게 여겨지지만, 비시간적이고 수학적인 우주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들 중에는 똑똑한 사람들도 많다)이 실제로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 또한 경험적인 사실이다. 아마 그들에게도 제법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이런 상황에서 어떤 관점이 더 합리적인지를 계속 따지고 들어가는 것이 철학이다.

 

   당신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했는데, 대체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죠? 시간은 존재하지만 흐르지 않는 것인가요? 아니면 시간은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흐르지도 않는다는 것인가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고 또 그 생각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지요? 저는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