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경험주의의 전통을 이을 뿐

강형구 2023. 4. 15. 17:03

   철학 연구자로서 나는 경험주의의 전통을 잇고 있다. 경험주의는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본다. 경험주의는 지식 수립에 있어 인간의 이성적 능력이 중요하고 필수 불가결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와 같은 이성의 역할을 불필요하게 과도한 방식으로 해석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경계한다. 지식은 인간이 만들어낸 경탄할만한 발명품이지만, 그와 같은 발명품에 그것이 정당하게 가져야 할 해석보다 지나친 해석을 부여해서 그러한 해석 부여를 통해 지식에 과도하고 부당한 권위를 부여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철학 연구자가 반드시 대학에서 철학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교수가 될 필요는 없다. 즉, 어떤 사람이 철학을 연구한다는 것과 그 사람이 대학에서 교수로서 일하는 것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물론 철학 연구자가 대학에서 교수로서 일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바람직하지만, 교수 이외의 다른 직업을 갖고서도 충분히 철학을 연구할 수 있고 그것을 실제의 삶 속에서 구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 나의 공식적인 직업은 대학교수가 아니라 국립과학관의 연구원인데, 과학관에서 다양한 일을 하면서도 그 속에 철학을 (특히 과학철학을) 녹여낼 수 있다.

 

   경험주의 전통에 속하는 철학 연구자인 나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험주의자였던 과학철학자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1891-1953)의 저서 [경험과 예측(Experience and Prediction)](1938년)을 번역하고 있다. 20세기 경험주의를 대표하는 저서를 영어에서 한국어로 옮기고 있는 셈이다. 철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위대한 철학자는 소수이고 비교적 평범한 철학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음을 알 수 있는데, 나는 그런 평범한 철학자 중 한 명이다. 평범한 철학자가 위대한 철학자의 저서를 번역하고 연구하는 것은 철학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흔한 일이다. 나는 철학사의 한 인물로서 편입되어 그와 같은 흔한 일을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 철학으로 학사, 석사,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 내게는 그렇게 철학사에 (한국철학사에) 편입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경험주의의 철학 전통은 언어를 통해 전달된다. 그러니까 인간 개체인 내가 내일 갑작스럽게 죽더라도 나의 철학적 작업은 나의 논문과 번역서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며 우리 사회의 지적 산물로서 남을 것이다. 1982년생인 나는 오늘을 기준으로 한국 나이로 42세이며 나에게는 세 명의 아이들이 있다. 내게는 대략 40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고, 이 시간 동안 철학 연구자라는 나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가장 본질적인 일은 철학적 활동을 하고 그 산물을 남기는 것이다. 논문을 쓰고 책을 쓰고 책을 번역한다면 그 산물은 물질이 되어 오래도록 우리 사회에 남는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의 경우, 그것을 별도로 촬영하지 않는 한 그 내용이 직접적으로 물질화되지는 않지만, 그 강의가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물질화와는 별도로 중요한 가치를 가질 것이다.

 

   경험주의자로서 나는 나를 포함한 인간 사회의 모든 개체가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사고하며 자신에게 맞고 적합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특히 나는 인간 개체들이 인간 스스로 집단 차원에서 만든 지식에 압도되거나 이용되지 않는 가운데 지식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 삶을 위해 적절히 활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나의 모든 철학적 활동(연구와 교육)은 그와 같은 바람을 소소하게 실현하기 위한 것이지, 무엇인가 아주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한다든지 아주 새롭고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한다든지 하는 것은 내가 염두에 둔 목표가 아니다. 당연히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다거나, 명성을 얻는다거나, 커다란 부를 얻는 것은, 처음부터 나의 바람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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