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글 쓰는 훈련

강형구 2023. 3. 18. 15:08

   학위기에 보면 나의 전공은 ‘과학사 및 과학철학’이라고 쓰여 있다.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나의 전공은 ‘과학철학’이지만, 사실 과학사 없이 과학철학을 제대로 할 수는 없다. 여기서도 중심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학에는 역사학만이 줄 수 있는 고유한 통찰이 있고, 이런 ‘역사적’ 통찰은 ‘철학적’ 통찰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과학철학은 과학사를 핵심적인 자원으로 삼아 ‘철학’을 하는 학문적 작업이다. 이러한 상황은 과학사에도 대칭적으로 적용될 것이다. 과학사 전체를 관통하여 역사 서술을 가능하게 하는 특정한 철학적 관점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역사가 철학이 되지는 않는다. 역사에는 철학과는 차별화되는 고유의 서술 방식과 이에 수반되는 통찰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철학 연구자인 내가 과학철학을 연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떤 통찰을 줄 수 있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과학철학 연구자인 내가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말한다면 나는 어떤 고유한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사람들은 나에게 상대성 이론에 대한 교과서적인 설명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교과서적인 설명은 나보다는 물리학 교사 혹은 교수 선생님들께서 더 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과학철학 연구자로서 관심을 가지는 점은 다음과 같은 측면이다. 상대성 이론과 관련해서 여러 사고 실험이 등장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과 관련해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빛을 따라간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할 수 있고, 빛 신호를 쏘아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곳에 있는 시계와 나의 시계를 어떻게 맞춰야 할지 상상할 수 있고, 나를 기준으로 아주 빨리 움직이는 물체의 길이를 어떻게 재야 할지 상상할 수 있다. 일반 상대성 이론과 관련해서, 중력장 아래에서 자유 낙하를 하는 사람이 자신의 운동 상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작은 방에 갇혀 있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일정한 가속 운동할 때 어떻게 생각할지, 아주 커다란 원판 위에 있는 사람이 작고 단단한 측정 막대를 가지고 원판의 둘레를 측정할 때 어떤 결과를 얻을지 상상할 수 있다. 이 사고 실험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며, 이런 나의 질문이 다소 고유하며 ‘철학적인’ 것일 수 있다. 이 모든 경험에 기초한 사고 실험에서 시간과 공간은 이미 가정된 것 아닌가? 빛 신호를 쏘는 것도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는 일 아닌가? 측정 막대를 들고 그것을 움직여서 원판의 둘레를 재는 것도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는 일 아닌가? 자유 낙하하는 사람을 상상하는 것은 또 어떤가? 낙하한다는 것 또한 이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원초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없다면 아인슈타인의 사고 실험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원초적 시간 공간 개념은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나는 이런 질문들에서 조금 더 나아간다. 만약 일반 상대성 이론 이후 이른바 ‘통일장 이론’(중력관성장과 전자기장을 통합하는)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통일 이론의 기초 개념과 원리는 이렇듯 경험에 기반한 우리의 사고 실험을 통해 적어도 ‘상상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사고 실험은 최종적으로는 실제로 우리가 물리적 세계에서 경험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새로운 ‘추측’을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인슈타인의 EPR 논문이 훗날 실험물리학자인 벨(Bell)의 부등식을 유도해냈던 것은, 바로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 비판이 이러한 사고 실험에 근거했기 때문이 아닌가? 만약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통일장 이론 추구 과정에서 상대론에서처럼 직관적인 사고 실험을 할 수 없었다면, 그것은 어쩌면 아인슈타인이 이론 탐구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 아닐까?

 

   당연히 이런 관점에 관해서는 여러 반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반론들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나의 글 또는 강연은 ‘과학철학적’ 성격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