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마지막 졸업식

강형구 2023. 2. 25. 05:57

   서울이 아닌 대구에 사는 나로서는 내 마지막 졸업식에 참석하는 일이 일종의 ‘업무’로 여겨졌다. 부모님과 가족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여행 준비를 한 후 오전 9시쯤 서울로 출발했다. 부지런히 차를 운전하여 학교에 도착하니 오후 1시가 조금 안 된 시각. 곧장 학과 행정실에 가서 학위기와 축하패를 받고 학위복 대여 신청 서류에 사인받은 후, 학교에 계신 교수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논문을 한 부씩 드렸다. 마침 이날 연구실에 나와 있던 과학철학 전공자들에게도 인사와 함께 논문을 한 부씩 전달했다.

 

   학위복을 대여해서 입은 후 신속하게 가족들과 사진을 찍었다. 학위복을 반납하고 식당 ‘두레미담’에서 식사를 오후 2시 정도에 시작했으니, 내 마지막 졸업 절차를 대략 1시간 만에 간단하게 끝낸 셈이다. 오래간만에 서울에 올라온 김에 아내와 큰딸이 좋은 공연을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오후 4시에 서울숲씨어터에서 시작하는 연극 ‘장수탕 선녀님’을 예매해 둔 터였다. 오후 3시쯤 점심 식사가 끝났고, 아내와 큰딸은 낙성대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공연장으로 갔고, 나는 부모님과 쌍둥이를 데리고 청담역 근처에 있는 예약된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에서 짐을 푸니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서울에 올라오는 내내 운전했고, 공식적인 졸업 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학교에 도착해서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졸업은 이상 없이 끝났다. 학부 졸업에 4년, 석사 졸업에 6년(중간에 군 복무 3년 4개월), 박사 졸업에 12년(중간에 직장 생활 11년) 걸렸다. 나의 박사 논문에는 지금까지 내가 연구한 과학철학적 성과가 집약적으로 담겨 있다. 이제 나는 나의 논문을 우리 사회의 공적인 지적 자산으로 제출한다. 물론 내가 나의 논문에서 내린 철학적 결론은 그 주제에 대한 가능한 결론 중 하나일 뿐, 결코 유일한 결론이 아니다.

 

   지금까지 재밌게 살아왔다. 학점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학부를 마쳤기에 내 학부 성적은 별로 좋지 않다. 군대에서 일하며 돈을 벌고 싶었기에 육군 장교로 복무했다. 나의 학부 전공은 철학이지만 내가 공부한 과학철학은 철학에서는 그리 흔한 세부 전공이 아니었다. 나는 문학사이지만 이학석사와 이학박사다. 과학과 철학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당연히 과학보다는 철학을 선택하겠지만, 나는 과학을 그 대상으로 하지 않는 철학이라면 그와 같은 철학은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내게 철학은 과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만약 처음부터 철학 교수가 되리라고 생각했다면 아마 나는 자연대학원보다는 인문대학원으로 진학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제대로 된 과학철학은 인문대학원보다는 자연대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자연대학원을 택했고 나의 그러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과학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필요했고 필요하고 필요할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제도적 현실은 그다지 녹록하지 않다. 철학과가 있는 대학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철학과가 있다고 해도 과학철학을 전공으로 하는 교수를 채용하는 경우 또한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걷는 길은 학문적으로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그러나 이 길이 힘든 길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나에게 더 자극을 준다.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킨다. 지금까지 나름 악전고투하며 여기까지 왔으니, 앞으로도 지치지 말고 계속해 보자. 이 길을 끝까지 한 번 가보자. 나는 철저하게 현실과 타협하면서도 그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기어코 해 나가려고 한다. 내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나의 과학철학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위라는 것은 일종의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학문적 탐구를 하는 모험가에게 주는 일종의 ‘훈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과학철학자로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아직 튼튼하고 더 달릴 수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여전히 과학철학에 목마르다. 나는 더 많은 과학철학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