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Philosophy First

강형구 2023. 5. 5. 10:17

   내가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내가 철학을 전공했다는 것이다. 철학은 근본적이면서도 멋진 학문이다. 물론 철학만을 전공하거나 공부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을 해도 되고 그런 형식적인 전공에 매이고 싶지 않다면 철학 말고 다른 것을 따로 공부하고 익히면 된다. 철학을 밑천으로 삼아 영화를 찍어도 음악을 만들어도 행정이나 법을 공부해도 된다. 계속 철학을 공부해서 철학으로 살아가려면 철학만 공부해도 되지만 사실 다른 학문이나 삶의 여러 측면을 두루 고찰하지 않는 철학이라면 그다지 흥미로울 것 같지 않다. 철학으로 살아가려고 해도 다른 학문 혹은 세계의 여러 모습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어쨌든 나는 철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을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깨닫게 된 것 중 하나는 늘 인간은 자신에 대한 저주를 극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아닌 사람 열 사람이 있다면 그 열 사람 중 나에게 우호적인 말을 해 주는 사람은 한두 명이거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나에게 아예 무관심하다면 오히려 상황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은 그렇게 착하지 않다. 내가 아닌 남을 혐오하고 저주하는 것으로부터 큰 힘을 얻는 것이 사람이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철학을 하겠다는 ‘생각’을 넘어 ‘결정’하고 그것을 ‘말’하니 기다렸다는 듯 곳곳에서 내게 저주들이 쏟아졌다. 심지어 나와 아주 친한 사람들마저도 걱정해준다는 표정으로 나를 저주했다. 흥미로운 것은 나 또한 그런 저주를 받아들여 나 자신을 저주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왜 철학을 선택했을까. 오히려 다른 전공을 선택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철학을 하는 인간은 그런 저주를 극복하고 재해석하면서 경험을 쌓고 성장하며 끝내 살아남는다. 지금 돌아보면 내게는 철학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았다. 대학에 입학할 때도 하나의 대학 빼고는 다 법학과로 지원했고 합격도 했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전공을 선택할 때도 철학과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전역을 하고 난 뒤에도 대학원에 가지 않고 취직할 수 있었고, 석사 이후 취업한 뒤에는 직장에서의 성공과 승진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 속에서도 나는 끝내 다른 선택을 하지 않고 철학을 선택했다.

 

   철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감수할 수조차 있는 학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에서 탈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대로 남아 독배를 마신 후 웃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그 죽음은 무엇을 위한 죽음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사회 혹은 집단의 부당한 평가에 굴복하지 않는,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개인의 이상을 지키기 위한 죽음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철학이라는 이름을 도용해서 강력한 집단과 권력을 옹호하고 합리화한 사람들을 철학자라고 보지 않는다. 늘 철학자는 권력자보다는 평범한 시민을 위해서, 강한 자보다는 약한 자를 위해서, 강력하고 지배적인 이론보다는 새로 태어나 연약하지만 참신한 이론을 위해서 변론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나는 철학과 철학자를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모든 철학자가 ‘다시 철학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거쳤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전쟁 등과 같은 온갖 일들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철학자가 되었고, 플라톤은 오랫동안 동방을 여행하며 여러 일들을 경험한 후 그리스로 돌아와서 철학자가 되었다. 철학을 배웠으되 자신의 삶을 통해 철학을 직접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철학으로 되돌아오는 이런 과정을 겪게 된다. 만약 당신이 세상을 직접 살아보고, 세상 속에서 철학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온갖 비아냥거림과 조롱을 직접 들어보고, 자신을 ‘철학자’라 부르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말하는 철학들을 접한 후, 끝내 다시 철학으로 돌아와 철학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여기게 된다면, 실제로 철학은 당신의 운명이며 당신은 그 운명을 충실하게 따라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