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저 들풀처럼 하루하루 산다는 것

강형구 2023. 7. 16. 19:58

   내가 유일하게 보는 드라마는 KBS 주말드라마인데,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는 “진짜가 나타났다”이다. 어제 저녁 가족들과 함께 드라마를 보다가 감명 깊은 대사가 나왔다. 극 중 여주인공은 헤어진 전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임신했지만, 아이를 지우지 않고 낳기를 결심했다. 그녀는 때마침 하기 싫은 결혼을 피하고 싶던 남주인공을 만나 그와 위장으로 결혼한 후(당연히 혼인 신고는 안 한다)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데, 결국 여주인공은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남주인공의 아이가 아님을 남주인공의 가족들에게 밝힌다. 여주인공의 어머니는 남주인공의 집까지 찾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한 후, 여주인공을 데리고 집으로 와 작은 화단에 심은 꽃들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연두야, 괜찮다. 저 꽃들이 하루하루 사는 것처럼 살아보자. 그렇게 살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그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저 꽃처럼, 저 들풀처럼 하루하루 살자. 이미 나는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의 절반을 보냈다. 나의 부모님에게 남겨진 시간은 내게 남겨진 시간보다 더 짧을 것이다. 나는 내게 삶을 주신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삶이라는 것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만한 기쁨도 주기 때문이다. 이 지구 위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썩 괜찮은 일이기도 하다. 전쟁과 사건 사고와 같은 온갖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재미있는 일들을 즐길 수 있다. 나는 어미 고슴도치처럼, 너무나 불완전한 나와 아내에게서 태어난 나의 아이들이 이 세상의 그 어떤 존재들보다도 예쁘고 소중하다.

 

   평범하다고 해서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평범한 존재들에게서 더 진실한 삶을 본다. 어쩌면, 비범한 존재들은 생생한 삶과는 괴리된 일종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최근 학술대회에서 본 한 연사의 근사한 프레젠테이션이 아니라, 늦은 저녁에 끼니를 때우기 위해 들어갔던 24시간 영업하는 작은 음식점에서 느낀 분위기였다. 아주 작고 효율적인 공간 배치에다, 사람들은 키오스크 앞에 서서 식사를 주문했다. 테이크아웃을 신청한 사람들은 김밥 몇 줄을 가지고 나갔고, 매장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은 아주 작은 식탁을 배정받아 자신이 주문한 요리를 먹었다. 밤 10시 가까이 된 시각에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가격이 만 원을 넘지 않는 단품 요리를 먹고 있던 다양한 사람들. 그때 창밖에는 어두운 거리 속에서 몇몇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있었다.

 

   어둑해진 거대한 도시 속 작은 음식점에서 그렇게 위를 채우기 위해 모인 사람들 속에 나 또한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대체 삶이라는 건 과연 무엇일까. 나는 거창한 의미를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나는 자연스럽게 내 가족과 함께 있을 때의 기쁨을 떠올렸다. 나는 아내, 아이들과 함께 작은 집에서 소박한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그 장면들과 느낌을 생각했다. 내게 그것보다 더 진지하고 거창한 내 삶의 의미가 있을까. 내가 속한 조직, 지방자치단체, 나라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이 되어 사는 삶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러한 삶을 내가 사는 것을 전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나는 저 들풀처럼 그저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한 줌의 공기와 물과 햇살만으로도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러한 평범한 삶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부모님이 점점 늙고 쇠약해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 아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것, 이제 나도 삶의 절반을 살았고 이제 내게 오직 삶의 절반만이 남지 않았다는 점을 깨닫는 것. 여전히 가끔 나는 거울 속 나를 보면서 섬뜩함과 경이로움을 느낀다. 저기 서 있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왜 저 사람은 벌써 저렇게 나이가 들었나. 여전히 저기 한 인간이 있고, 그 인간은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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