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베트남 하노이의 기억

강형구 2023. 7. 23. 22:32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다녀왔다. 2023년 아시아태평양 과학철학회(APPSA) 학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학술대회 발표 신청을 한 나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왜냐하면 정말 나로서는 물리적으로 발표 준비를 할 시간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7월 1일자로 복직한 이후 직장에서는 새로 맡게 된 업무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집에 돌아오면 애들 보고 집안일 하느라 바빴다. 그렇다고 이미 발표하기로 된 것을 취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발표 전날의 늦은 밤에 겨우 발표 자료를 담당자에게 메일로 보낼 수 있었다. 발표할 때도 부족한 영어 실력 때문에 퍽 버벅거렸고, 내가 질문자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주어진 발표를 펑크내지 않고 무사히 끝냈다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하노이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았다. 다행히 날씨는 맑고 비가 오지 않았다. 나는 숙소인 대우 호텔에서 베트남 예술 박물관까지 백팩을 매고 걸어갔다. 거리에는 나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대부분 차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명백하게도 오토바이가 대세인 듯했다. 일본의 도쿄, 대만의 타이페이, 태국의 방콕 등을 돌아다녀 봤지만, 베트남처럼 오토바이가 보편적인 교통수단의 역할을 한 나라는 없었던 것 같다. 흥미롭게도 베트남은 신호등으로 대표되는 교통 통제 체계에 의해서 교통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시시각각 상황에 맞게 미시적인 질서를 만들어냄으로써 교통이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당연히 교통 통제를 따랐지만, 이 통제는 엄격하기보다는 다소 유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예술 박물관까지 걷다가 무작정 길가에 있는 한 음식점에 들어가 쌀국수를 주문했다. 더운 날씨라 낡은 선풍기 여러 대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고, 내 앞에는 식당의 안주인이 갓난아이를 안고 있었다. 배가 고팠던 차라 나는 앉은 자리에서 쌀국수와 야채를 남김없이 모두 먹었다. 그렇게 점심을 해결하고 한참을 걸어갔다. 오토바이들이 나를 지나쳤고, 나는 거리 사이 사이로 사람들의 흔적을 보았다. 나는 그렇게 걸어 다니며 사람들과 마주치고, 일하는 사람들을 보고, 좁고 굽이진 골목들과 그들의 삶의 터전을 보는 게 좋았다. 베트남 예술 박물관에 도착한 뒤 비로소 한숨 돌렸는데, 그것은 건물 안에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베트남 예술 박물관이 참 인상 깊었다.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원 전 시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베트남 사람들이 만든 도자기, 공예품, 미술 작품 등을 상당수 관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외형적으로 보면 건물의 크기나 내부 디자인은 소박했지만, 소장품의 양이나 질은 제법 괜찮았다. 내게 베트남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그 문화 속에 유교, 불교, 도교의 요소가 혼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흔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베트남 사람들은 자신들이 결과적으로 ‘승리’했음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외세의 침입 속에서도 이들은 꿋꿋하게 자신들의 국가와 전통을 지켜냈다. 총을 들고 있는 당찬 여성들의 모습도 미술관 곳곳에서 보았다.

 

   성요셉성당도 좋았고 호안끼엠 호수와 응옥선 사원도 아름다웠지만, 그 무엇보다도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이들에게 남겨진 ‘저항과 승리의 역사’였다. ‘아저씨(uncle)’라고 불리는 호찌민은 내게 베트남인들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보였다. 미술 작품에도, 조각상에도 호찌민이 나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나는 그가 ‘영웅’이라기보다는 베트남 국민 차원의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세련됨은 우리가 그들보다 나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었다. 나는 건물과 제품의 깔끔함, 서구식 스타일의 보편성 등은 크게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 역사 속에서 꿋꿋하게,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전통과 정체성을 지켜 온 이들의 모습이 부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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