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성실은 성공이 아닌 생존의 조건

강형구 2023. 6. 20. 09:41

   지금까지 41년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 비교적 분명하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다. 내가 머리가 좋은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머리가 나쁘지 않다는 것은 비교적 분명해 보이지만,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머리가 좋은지는 전혀 확실하지 않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이룬 것은 대부분 뛰어난 지성보다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요구하는 일들이었지, 특출난 지적 능력을 요구하지는 않는 일들이었다. 어쩌면 성실함은 내게 일종의 ‘생존 전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에 대한 나의 과도한 애정은 제3자의 객관적 관점에서 보면 나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은 일종의 ‘일탈’이었다. 내게 물리학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없었다면 나는 과학고등학교로 진학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중학교에서 늘 전교 1등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졸업 당시 졸업생 중에 가장 높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만약 내가 과학고등학교가 아니라 일반고등학교에 진학해서 평범하게 공부하며 그 공부의 추세를 어느 정도 유지했다면, 분명 나는 수도권의 주요 대학으로 진학했을 것이다. 나의 천성적 자질과 잘 맞지 않는 이 ‘환상’ 때문에 나는 갖은 고생과 방황을 하면서 고등학생 시절을 보내야 했다.

 

   만약 41살인 지금의 내가 20살이었던 과거의 나에게 조언한다면, 나는 서양사학이나 국사학을 전공한 후 학부 시절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장교로서 복무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장교로서 복무하면서도 틈틈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나는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편이므로, 그렇게 학부 시절 및 군 복무 시절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전역 후 1-2년 정도 추가로 준비했다면, 분명 7급 공무원 이상의 시험에서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무난하게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 지극히 평범하게 살게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실제로 나의 진짜 운명은 내 재능과는 맞지 않는 나의 환상 혹은 열정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왜 나는 내가 오를 수 없는 나무를 바라보며 오르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을까? 왜 그런 돈키호테적인 열망을 나는 평생 포기할 수 없었을까? 나 스스로가 지금껏 나의 삶을 살아왔으면서도 나는 때때로 나의 과거를 돌아보며 의문에 잠기곤 한다. 바로 이런 기묘한 측면이 진정한 삶의 재미이자 역설 같기도 하다. 어쨌든, 결국 나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과학철학 연구자로 성장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 스스로에 대해 전혀 환상 같은 것을 가지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기보다는 세상의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사람이며, 특유의 성실함을 활용하여 특출난 지적 재능을 요구하지는 않는 일들을 충실하게 이행하며 우리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이다. 나는 사회적 생존에는 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대가는 다름이 아닌 ‘노동’일 것이다. 이때 노동은 육체적일 수 있고 지성적이거나 감정적일 수도 있다. 나는 나의 박사학위가 지성적 노동으로 사회적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학창 시절 교실 청소를 아주 열심히 했다. 내가 열심히 과학철학 연구를 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종류의 성실함이다. 이 세상에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상, 성실함은 지금껏 나에게 ‘성공’의 조건이 아닌 ‘생존’의 조건이었다. 내 생각에, 강한 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되기 위해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삶이 내게 알려준 ‘냉정한 현실’이다. 나이가 들수록 현실 감각은 더 예리해지는 동시에, 내가 과거에 가졌던 환상의 정체와 기능이 갖는 의미가 더 분명하게 파악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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