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356

꼭 필요한 만큼만

내 삶의 가능성이 청년 시절에 비해 부쩍 줄어든 만큼 내게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 많이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 식사의 경우 나는 밥 한 공기에 김치와 간단한 반찬만 있으면 맛있게 먹는다. 옷은 이미 사둔 옷들을 대충 깔끔하게 차려입는다. 신발도 마찬가지다. 이미 사둔 신발들이 제법 있어서, 새 신발에 대한 욕심을 내지 않고 그냥 신던 신발을 신는다. 책도 비슷하다. 내가 관심을 둔 분야의 책들은 이미 대부분 구비하고 있어 굳이 새로 책을 살 필요가 없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나의 삶을 영위하는 데는 비누, 치약 등과 같은 최소한의 생필품이 필요할 뿐이다. 내 삶에 꼭 필요한 것들 중 하나가 음악인데, 요즘은 인터넷에만 접속할 수 있으면 거의 모든 음악을 즐길 수 있다. 그러므로 학창 시절에는 음반을 사는..

일상 이야기 2024.01.31

사회적 생존을 위한 선택

부모님에게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측면 모두에서 의존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러한 의지를 ‘독립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독립성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금수저’가 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물려받은 재산 대부분을 포기했다.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독립성이 강했다. 1997년 IMF 금융위기 이전에 우리 집의 재정 형편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교육에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을 싫어했다. IMF 금융위기는 나의 독립성을 더 심화시켰다. IMF를 통해 나는 직업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안정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나의 아버지는 대구..

일상 이야기 2024.01.27

다시 본연의 마음자세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나도 모르게 욕심을 가졌던 것 같다. 내 능력을 초과하는 일들을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잠시나마 착각을 했다. 작년 2월 말에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이제 거의 1년 지났다. 박사가 된 이후 내가 겪었던 여러 일들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다시 내 본연의 마음자세로 돌아가려 한다. 한 사람, 특히 나와 같은 평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이것저것 많은 일들을 벌릴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해 왔고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을 앞으로도 계속 하는 것이 나 자신에게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좀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라이헨바흐의 [시간의 방향] 번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이 작업을 과학관에서의 나의 연구와 연결시키려 한다. 우리 과학..

일상 이야기 2024.01.22

고량주를 마시며

작년 10월에 과학관에서 무한상상 경진대회를 운영했을 때 중국 팀을 이끌었던 분(조선족 출신)께서 한국에 방문하신 후 내게 대회 준비하느라 고생한다고 고량주를 한 병 선물해 주셨는데, 오늘은 기분이 좋아 아껴 두었던 이 고량주를 마신다. 53도 가까이 되는 독한 술이다. 나는 오늘 밤 고량주를 마신 후 흥겨운 마음에 이 글을 쓴다. 우선 나는 2012년 1월 이후로 나를 공인으로 살게 해 준 나의 운명에 감사한다. 나는 교육부 산하의 공공기관인 한국장학재단에서 일할 때부터 우리나라 국민의 세금을 바탕으로 나의 사회적 생존을 유지해 왔다. 나는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공공기관 직원으로서 일하며 살아온 나의 삶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물론 민간 기업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그 액수가 적은 연봉이지만, 나는 지..

일상 이야기 2024.01.16

두 지도교수님과의 신년 하례식

어제는 바쁜 하루를 보냈다. 첫째 아이를 차에 태워 등교(겨울방학 중 돌봄교실)시킨 후, 김천구미역으로 가서 KTX 열차를 탔다. 서울역에 도착해서 강남역으로 이동, 과학철학 전공 대학원생 3명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대략 5시간 동안 수다를 떨었다. 이 시간에 나는 대학원생들에게 최대한 졸업에 필요한 실질적인 요령을 전달하려고 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바람직한 경로를 따라 성공한 선배는 아니다. 그래도 무사히 졸업을 했고 현재 조금이나마 전공을 살려서 직장에서 업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평균 정도의 성과를 얻은 선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철학 전공 박사과정 대학원생들과의 즐거운 시간 이후, 역시 강남역 근처에 있는 한 우동 가게로 향했다. 가게에 들어가니 이미 전 ..

일상 이야기 2024.01.10

새해라는 상징

매년 1월 1일 새벽이 되면, 부산에 살고 있던 우리 가족은 동해안으로 이동하여 떠오르는 태양을 보곤 했다. 부모님과 누나와 나는 새벽 5시 전후로 일어나 약간의 먹을거리를 챙긴 후 승용차를 타고 동해안인 칠암방파제 근처로 이동해서 30분쯤 기다렸다가 바다 수면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렇게 우리 가족은 매년 새해를 기념했고, 이후 칠암 근처에 있는 절인 장안사를 찾아 부처님께 인사드린 후, 자주 찾아가는 칼국수 집에 들러 칼국수와 두부를 아침으로 먹곤 했다. 누나와 내가 결혼을 한 후에는 우리 가족의 이런 전통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러나 올해 나는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가 이 전통을 지켰다. 예전에는 아버지께서 운전하셨지만, 올해에는 내가..

일상 이야기 2024.01.01

2023년 결산, 2024년 계획

방금 2023년 2학기 수업의 성적 입력을 끝냈다. 이제부터 진정한 연말 휴가가 시작된다. 학생들이 성적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있지만, 큰 문제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집에서 아이들 돌보고, 회사에서 일하고, 대학에서 강의하느라 피로가 누적되고 면역력이 떨어진 것 같다. 예전에 한 번 겪어 본 적이 있는 대상포진(帶狀疱疹)이 연말에 내게 찾아왔다. 그래도 그 정도가 예전보다는 심하지 않아, 금방 건강을 회복할 듯하다. 돌아보면 참으로 2023년을 바쁘게 보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박사학위를 끝냈다는 것이다. 2023년 2월에 겨우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에는 직장에 복직하기 전까지 라이헨바흐의 [경험과 예측] 번역에 주력했다. 초벌 번역을 끝낸 후 출판사에 원고를 넘길 수 있었다. 한국과학철학회 연례..

일상 이야기 2023.12.29

조용하고 복된 성탄

며칠 전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뭐 하세요? 무슨 특별한 계획 있으세요?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셨나요? 이 물음들에 대해 나는 단순하게 대답했다. 다른 계획은 없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게 전부입니다. 사실 예배를 드리는 게 제일 중요하고요, 예배드리면서 느끼는 감사함의 감정이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에 비한다면 물질적인 선물은, 받으면 좋기는 하지만 안 받아도 그만인 그런 선물입니다. 성탄절 예배 끝나고 집 근처 장난감 가게에 가서 아이들에게 하나씩 소박하게 사 주려 합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나를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러한 생각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 어린 시절부터 절에 자주 다녔다. 한국의 승려들에 관한 이야기책도 자주 ..

일상 이야기 2023.12.25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존경하되 추종하지는 말라. 언제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다. 설혹 내가 아닌 남을 위해 혹은 어떤 이상이나 신념을 위해 나를 희생하거나 헌신하더라도, 그러한 희생 혹은 헌신은 철저히 자기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내가 축구선수라면 내가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열심히 꾸준히 계속 축구하면 되고, 내가 과학철학 연구자라면 내가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열심히 꾸준히 계속 나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과학철학 연구를 하면 된다. 물론 이때 유의해야 하는 것은 편협하거나 권위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건전하고 합리적인 조언과 충고는 ..

일상 이야기 2023.12.21

실용주의적 관점

나는 평소 여러 가지 상황을 대할 때 미시적이고 국소적인 관점을 취한다. 예를 들면, 나는 나라는 사람을 나의 가족이란 특수하고 국소적인 환경에서 등장한 산물이라고 본다. 나는 1982년에 태어난 이후로 나의 가족이란 환경에서 적응하고 투쟁하면서 지금까지 내 인생의 각 단계를 거쳐 왔다. 내가 다녔던 청운 유아원, 명륜 유치원, 명륜 초등학교, 동해 중학교는 내 삶의 형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부산과학고등학교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철저히 한국적인 교육제도 아래에서 특정한 집단에 속해왔고, 그 집단에서의 경험을 통해 내 삶을 형성해 왔다. 매 단계에서 나는 내가 속한 집단 안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협력하고 경쟁하며 나의 삶을 운영했다. 부산과학고등학교에서 자퇴했다는 것은 한국적 교육제도 아래에서의 ..

일상 이야기 2023.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