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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의 위안

나는 경쟁에 매우 서툰 사람이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인간 세상에서는 끊임없이, 쉬지 않고 경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경쟁에서 언어는 대부분 순수한 도구로서 기능한다. 언어는 상대방과 싸우거나, 다른 상대방과 연합하는 데 사용된다. 또한 언어는 유희를 위해서도 빈번하게 사용된다. 가끔씩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토크쇼를 보면 출연자들이 얼마나 맛깔나게 언어유희를 하는지 모른다. 인간들끼리 육체를 이용해 서로 합법적으로 경쟁하는 것은 스포츠다. 사람들은 스포츠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서로 육체적인 경쟁을 한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언어적인 경쟁이다. 말을 잘하고 못하는 것은 오늘날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책이라는 존재는 나에게 다소 기묘한 느낌을 ..

일상 이야기 2020.03.21

지키고 가꾸는 일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는 깨어 있는 동안에는 늘 무엇인가 일을 하셨다. 밭에 나가서 김을 매거나, 방을 닦거나, 나물을 다듬거나, 설거지를 하셨다. 할머니는 영특하신 편은 아니셨지만 부지런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나는 할머니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할머니의 초인적인 부지런함은 나에게는 늘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 되돌아보면 나는 나의 할머니로부터 그런 부지런함을 물려받은 게 아닌가 싶다. 나에게는 지적인 영특함은 없지만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하는 근성과 부지런함은 있다. 3월 18일에 나의 다섯 번째 번역서 [상대성 이론의 공리화]가 출판된다. 나는 학부 4학년 때(2004년)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때는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읽어도 도저히 이..

일상 이야기 2020.03.08

과학을 철학함

전염병이 나라를 넘어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요즘, 그저 조심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나는 그저 내게 주어진 일들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주 금요일(2월 28일)에 과학철학 종합예비시험을 치렀다.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3시간 동안 A4용지 5장을 손글씨로 빼곡하게 채우면서 나는 아직까지 나 스스로가 참으로 부족함을 느꼈다. 논술고사 이후에는 구술고사가 예정되어 있어, 틈틈이 과학철학과 관련된 여러 논의들을 다시금 살펴보고 있다. 이제는 잠시 미뤄두었던 스몰린의 책 번역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조만간 라이헨바흐의 [상대성 이론의 공리화]가 출간될 것이다. 그의 책 [경험과 예측]을 번역하고 나면 나는 스스로가 박사학위논문을 쓸 자격을 어느 정도 갖추었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일상 이야기 2020.03.03

즐기면서 일하기

최근 바쁘게 지냈다. 아내가 쌍둥이를 임신 중이라 주중에 회사에서 퇴근하면 곧바로 집으로 와서 밥 먹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했다. 게다가 2월 말에 과학철학 종합예비시험이 계획되어 있어, 하고 있던 스몰린의 책 번역을 잠시 미뤄두고 틈나는 대로 시험공부를 했다. 과연 나는 마지막 남은 논문자격시험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인가. 시험 준비 초반에는 시험에 꼭 통과해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이 있었다. 지금은 그냥 편하게 마음을 먹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을 하려 한다. 나는 올해도 회사에서 재미있는 일들을 많이 한다. 우선, 경북대학교 수학교육과 기우항 교수님의 기증 자료들을 활용하여 10월에 기하학 특별전 [도형의 아름다움]을 개최한다. [수학사랑]이라는 수학 전시 및 교구 전문 업..

일상 이야기 2020.02.10

과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푸앵카레의 저서 [과학과 가설]은 철학적 저술이었다. 어느 시대이든 과학적 지식은 특정한 종류의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예를 들어 17세기 말에 제시된 뉴턴의 물리학은 중력이라는 물리적 힘의 구체적인 작용 과정에 관한 철학적 문제, 뉴턴이 제시한 절대적 시간과 공간에 관한 철학적 문제를 제기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푸앵카레가 활동하던 무렵에는 과학을 `유명론'적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특정한 자연현상을 동등하게 기술할 수 있는 복수의 기호체계들이 존재한다면, 결국 그러한 각각의 기호체계는 자연을 반영한다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편리한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현상을 기술할 수 있는 수학적 기하학이 유일하지 않다..

기하학의 역사와 의미를 되돌아보는 기하학자

나는 2018년에 처음으로 경북대학교 수학과 기우항 교수님을 뵙게 되었다. 기우항 교수님께서 대구과학관이 주관하여 진행하는 정책연구의 조사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2018년 이래로 기우항 교수님을 자주 찾아뵈었다. 찾아뵐 때마다 이제 자신에게는 필요 없는 것들이라며 이런저런 자료들을 많이 주셨다. 교수님께서 남기신 논문들과 연구 노트들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내용들(미분기하학 분야의 전문적인 논문들)이라 도저히 소화를 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교수님의 저술들 중에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도 제법 많이 있었다. [기하학의 흐름], [기하학이란 무엇인가], [기하학의 발전과 전망], [기하학의 발전과 장래]. 이와 비슷한 제목의 논문 혹은 기고문들을 기우항 교수님의 자료에서 자..

일상 이야기 2020.01.10

책상에 앉아 백일몽에 빠지는 시간

2020년이 되면서 나이가 한 살 늘었다. 올해로 내 나이 서른아홉이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는 서른아홉이 많은 나이이겠고, 나보다 나이 많으신 분들에게는 아직 한창인 나이이겠다. 그런데 내게 재미있는 사실은 나이를 들어도 나의 기본적인 감성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부터 학교가 끝나면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을 다녔다. 하루는 영어 하루는 수학을 번갈아가며 매일 70분씩 가르쳤다. 수업이 끝나면 항상 종이의 앞뒤 양면이 가득 찬 숙제를 한 장씩 주었고, 숙제에는 제법 어려운 문제들이 실려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하루의 남은 시간 동안 그 문제들을 푸느라 씨름했는데, 나는 그렇게 문제를 푸는 시간을 무척 즐겼다. 나에게는 몇 문제를 맞히느냐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

일상 이야기 2020.01.04

과학을 음미하기, 과학을 이야기하기

나의 직책은 국립과학관의 연구원이다. 연구원이라면 연구를 하는 사람일 텐데, 나는 무슨 연구를 하고 있나? 나는 과학의 한 분과에 소속되어 연구하는 과학자는 아니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만들어내는 것들을 음미하고,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나는 다양한 과학기술자료들을 수집하고, 이것들을 수장고 또는 연구실에 보관한다. 그 후 이것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혹은 무슨 의미를 갖는지 알아낸다. 그 결과 중에서 중요하고 필요한 내용들은 과학관에 전시한다. 그와 더불어 나는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 중 일반 대중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아이템들을 찾고 이를 대중들이 접근하기 쉬운 형태로 전시한다. 올해 나는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와 협업하여, 대구경북 산업과학기술사 및 주요인물에 대해서 연..

일상 이야기 2019.11.16

멍하게 있는 시간

2019년 10월 1일부터 두 개의 기획전시를 동시에 시작한 이후 나는 약간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전시 시작하기 전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한동안 계속 주말에 회사에 나가 일을 했기 때문에, 11월 중순까지는 매주 월요일을 대체휴무일로 받아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월요일 오전에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난 후 나는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카페에서 나는 그냥 멍하게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테이블 위에 책 한 권, 노트 한 권, 커피 한 잔을 두고 마냥 생각에 잠겨 있다. 이 시간 동안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멍하게 있다. 한스 라이헨바흐의 [상대성 이론의 공리화] 번역을 끝내고 난 뒤, 나는 이론물리학자 리 스몰린(Lee S..

일상 이야기 2019.10.20

예측 불가능한 것에 대한 사랑

조국 법무부장관의 딸의 대학 입학과 대학원 진학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던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대학에 진학하여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혀 예측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는 의류도매상인이었고 나의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두 분 다 공부하는 것에 큰 관심이 있는 분들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나는 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드라마와 소설을 통해 이야기의 세계가 갖는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이야기가 재미있어 소설들을 읽으며 책과 친해졌고, 이를 계기로 책들이 모여 있는 서점과 도서관에 들락거리며 이런저런 책들과 만났다. 과학의 역사와 철학에 관한 책들을 만난 곳도 서점과 도서관이었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놀기 위해 간 곳에서 책들..

일상 이야기 2019.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