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멍하게 있는 시간

강형구 2019. 10. 20. 22:29

 

   2019101일부터 두 개의 기획전시를 동시에 시작한 이후 나는 약간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전시 시작하기 전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한동안 계속 주말에 회사에 나가 일을 했기 때문에, 11월 중순까지는 매주 월요일을 대체휴무일로 받아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월요일 오전에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난 후 나는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카페에서 나는 그냥 멍하게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테이블 위에 책 한 권, 노트 한 권, 커피 한 잔을 두고 마냥 생각에 잠겨 있다. 이 시간 동안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멍하게 있다.

 

    한스 라이헨바흐의 [상대성 이론의 공리화] 번역을 끝내고 난 뒤, 나는 이론물리학자 리 스몰린(Lee Smolin)이 쓴 책 [다시 태어난 시간(Time Reborn)]을 읽고 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책이 술술 읽힌다. 책의 1/3 가량을 읽었는데, 이 정도만 읽어도 스몰린이 과학의 역사와 철학에 제법 깊은 조예가 있는 사람임을 알 수가 있다. 사실 나는 출판사로부터 연락을 받기 전까지 스몰린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스몰린과의 만남은 내게 매우 유익한 만남이 될 것 같다. [나우 : 시간의 물리학]을 통한 실험물리학자 리처드 뮬러와의 만남 역시 매우 유쾌했다.

  

   회사에서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 내가 하는 행동들은 단순하며 전형적이다. 이 시간에 나는 딸과 놀거나 설거지나 청소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밤에 아내와 딸이 샤워를 하면 나는 다방 커피를 한 잔 타서 손에 들고 아파트 1층에 내려가 음식물쓰레기를 버린 다음,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아파트 단지 안을 걷는다. 며칠 전에는 그렇게 산책을 하면서 놀라운 경험을 했다. 밤에 하늘이 맑고 달이 크고 선명하게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천체인 달이 하늘 중간에 덩그러니 떠서 밝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경이롭게 느껴졌다. 어떻게 저렇게 큰 물체가 떨어지지 않을까? 나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는 물리학 공부를 통해 왜 달이 떨어지지 않는지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실 달은 떨어지고 있다. 사실 달은 지구 주변에 형성된 시공간의 측지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으로 저 멀리 있는 커다란 달을 보면서, 왜 저 정도로 커다란 물체가 떨어지지도 않고 저렇게 떠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경이로움을 느낀다. 내가 물리학을 제대로 체화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아마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느끼는 이러한 종류의 경이로움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나는 이러한 경이로움의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경이로움은 나로 하여금,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만든다.

  

   스몰린의 책은 의외로 쉽게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쉽게 서술해 준 스몰린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번역을 시작하기 전에 과학철학 일반에 관련된 책들과, 예전에 사 두긴 했으나 아직 제대로 읽지 않은 몇 권의 과학 관련 책들을 읽을 생각이다. 한 번에 한 권씩, 여유롭고 느긋한 마음으로 읽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게서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을 자유롭게 놔둔다. 멍하게 있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러간다.

  

   스몰린의 책을 번역하고 난 후에는 라이헨바흐의 [경험과 예측], [물리적 지식의 목적과 방법]을 번역할 계획이다. 내년까지만 번역을 한다. 2021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할 예정이며, 작성 과정에서 학위 논문 일부의 내용을 추려내어 학술지에 투고할 것이다. 박사학위 논문이 완성되어 학위를 취득하게 된 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라이헨바흐의 책들을 번역할 것이다. [기호논리학], [확률론], [법칙적 진술과 허용 가능한 연산], [시간의 방향] . 왜냐하면, 그의 책들은 매우 재미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