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예측 불가능한 것에 대한 사랑

강형구 2019. 9. 14. 15:11

 

   조국 법무부장관의 딸의 대학 입학과 대학원 진학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던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대학에 진학하여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혀 예측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는 의류도매상인이었고 나의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두 분 다 공부하는 것에 큰 관심이 있는 분들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나는 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드라마와 소설을 통해 이야기의 세계가 갖는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이야기가 재미있어 소설들을 읽으며 책과 친해졌고, 이를 계기로 책들이 모여 있는 서점과 도서관에 들락거리며 이런저런 책들과 만났다. 과학의 역사와 철학에 관한 책들을 만난 곳도 서점과 도서관이었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놀기 위해 간 곳에서 책들을 만났다. 아마 그 책들 또한 나를 만나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 아내는 공부를 하기 좋아한다. 끼리끼리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나는 나의 딸도 우리 부부처럼 공부하기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나의 딸이 이 세상 속에서 마주칠 수 있는 흥미로운 우연과 만남들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다. 나의 부모님이 내가 공부를 좋아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던 것처럼, 나와 아내 역시 내 딸의 운명을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가 될 수 있는 계획된 삶의 각본을 딸에게 제시하기 보다는, 좀 더 예측불가능하고 성공 가능성이 적더라도 나의 딸이 자기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유와 책임을 주고 싶다. 무엇보다도 나는 딸에게 삶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느끼게 해 주고 싶다. 학교가 끝나면 여러 학원들을 돌아다니며 숨 쉴 틈 없는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해가 질 때까지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거나 저녁 먹기 전까지 도서관에서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주고 싶다.

 

   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러서 대학에 입학했다. 입시를 준비하는 나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나는 어떻게든 입시 제도에 맞춰서 시험을 준비한 후 시험을 치러 대학에 입학해 과학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입시 제도는 A일 수도 있고 B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든 대학에 들어가려면 제도에 순응해야 했다. 공부를 하는 것은 나의 의무이자 일이었지만, 정작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은 따로 있었다. 수능 시험이 끝난 후 사람들은 나에게 왜 철학과가 속한 인문대학 인문계학과군(철학, 미학, 종교학, 국사학, 서양사학, 동양사학, 고고미술사학)에 지원하느냐고 물었다. 나보다 수능 성적이 더 낮은 학생이 경제학부에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딱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저 과학철학을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철학과 진학 이후 나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큰 괴리가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내가 졸업하고 취직해야 했던 시기에 철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은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왜 이렇게 알아주는 사람이 많지도 않은 소수적인 학문을 하고 있을까? 대체 무엇 때문에? 서양 학문이 유입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서양 과학에 대한 자생적인 이해도 아직 턱없이 부족한 대한민국이라는 이 나라에서, 과학철학이라는 학문을 내가 도대체 왜 하게 된 것일까? 예측할 수 없는 우연들로 인해, 지금 생각하면 소박하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꿈을 꾼 덕택에, 세속적으로 말하면 헛된 꼬임에 빠져 나는 지금의 내 삶을 살고 있다. 대단하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으며 어쩌면 별로 쓸모없는 삶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 삶은 나의 선택에 의해서 진행되었고 내 삶에 대한 모든 책임은 오롯이 나에게 있다. 내 삶은 나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삶을 나의 딸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삶이 매 순간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삶이란 본질적으로 허무하고 지루한 것이라는 사실, 온갖 가능성들이 그 허무함과 지루함 위에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그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아름다운 꿈과 열정들이 태어나고, 생각하지 못했던 사건들과 산물들이 튀어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