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과학을 음미하기, 과학을 이야기하기

강형구 2019. 11. 16. 10:48

 

 

   나의 직책은 국립과학관의 연구원이다. 연구원이라면 연구를 하는 사람일 텐데, 나는 무슨 연구를 하고 있나? 나는 과학의 한 분과에 소속되어 연구하는 과학자는 아니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만들어내는 것들을 음미하고,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나는 다양한 과학기술자료들을 수집하고, 이것들을 수장고 또는 연구실에 보관한다. 그 후 이것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혹은 무슨 의미를 갖는지 알아낸다. 그 결과 중에서 중요하고 필요한 내용들은 과학관에 전시한다. 그와 더불어 나는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 중 일반 대중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아이템들을 찾고 이를 대중들이 접근하기 쉬운 형태로 전시한다.

  

   올해 나는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와 협업하여, 대구경북 산업과학기술사 및 주요인물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 경북대학교 수학 연구 전통의 역사, 대구경북지역 자동차부품산업사를 연구하고, 이와 더불어 대구경북지역 산업분야와 과학기술분야의 주요 인물 4명을 선정하여 이들에 관해 조사하고 있다. 과학관에 연구 인력이 풍부하면 자체적으로 조사연구를 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자체 조사연구가 어렵다. 과학관에는 과학기술사 및 과학철학 전공자가 나를 포함해서 3명이 있지만, 각자 다른 부서에 속해 있고 서로 다른 업무들을 한다. 또 이 3명 모두가 한국근현대과학사를 전공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전북대학교 전문가 집단의 도움을 받아 조사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과학관에 연구 인력이 보강되어 해당 지역의 산업과학기술사에 대한 조사연구를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산업과학기술사 연구가 선행되어야 그 지역에 어떤 중요한 과학기술자료들이 분포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고, 이 연구를 바탕으로 지역의 중요 과학기술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다. 물론 과학관에서 산업과학기술사 연구 인력 정원을 확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나는 나의 경우에도 아주 우연적인 다수의 요소들이 작용하여 (운이 좋게) 과학관에 입사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관에서 산업과학기술사 연구 인력을 확보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만약 내가 훗날 과학관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면, 나는 반드시 연구 인력 확보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이다. 아직 나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

  

   이에 더해, 올해 나는 계측영상장비 및 화석에 관한 특별전을 준비해서 지금 현재도 운영하고 있다. 계측영상장비 특별전은 기증품 계측기기와 대여 영상장비를 활용한 전시이고, 화석 특별전은 기증품 및 대여 화석들을 활용한 전시이다. 나는 전자공학 또는 지질학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전시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과정에서 다른 전문가들의 많은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학 전문가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어떤 내용을 전시할지, 어떤 전시품을 전시할지를 결정하고 이에 관한 콘텐츠를 직접 만들어내는 것은 전시 담당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어쩌면 과학자의 일보다는 더 현실적이고 실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과학철학에 관한 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것, 과학에 관한 책들을 번역하는 것은 어쩌면 나의 공식적인 업무가 아닌 부수적인 활동이다. 나는 올해 실험물리학자 리처드 뮬러의 [나우 : 시간의 물리학]을 출간했고, 과학철학자(논리경험주의자) 한스 라이헨바흐가 쓴 [상대성 이론의 공리화] 번역 원고를 출판사로 보냈다. 박사학위 논문자격시험 중 이론철학 분야 시험을 통과했으며, 마지막 남은 논문자격시험인 과학철학 종합예비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최근 이론물리학자 리 스몰린의 [다시 태어난 시간] 번역을 시작했다. 어쩌면 이런 부수적인 활동들을 과학철학적 활동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과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혹은 과학을 음미하기 위한 활동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