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책상에 앉아 백일몽에 빠지는 시간

강형구 2020. 1. 4. 10:21

 

   2020년이 되면서 나이가 한 살 늘었다. 올해로 내 나이 서른아홉이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는 서른아홉이 많은 나이이겠고, 나보다 나이 많으신 분들에게는 아직 한창인 나이이겠다. 그런데 내게 재미있는 사실은 나이를 들어도 나의 기본적인 감성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부터 학교가 끝나면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을 다녔다. 하루는 영어 하루는 수학을 번갈아가며 매일 70분씩 가르쳤다. 수업이 끝나면 항상 종이의 앞뒤 양면이 가득 찬 숙제를 한 장씩 주었고, 숙제에는 제법 어려운 문제들이 실려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하루의 남은 시간 동안 그 문제들을 푸느라 씨름했는데, 나는 그렇게 문제를 푸는 시간을 무척 즐겼다. 나에게는 몇 문제를 맞히느냐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그 문제들을 풀면서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 딱히 다른 취미가 없었던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책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학교 수업에서 배우는 수학이나 과학이 별로 재미없었다. 대신 나는 수학이나 과학에 관련된 책들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 때는 책 읽는 것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책 읽는 법을 배워야 했다. 서점이나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빼서 읽은 후, 그 책에 대해서 나름대로 평가한다. 그 다음 다른 책을 한 권 빼서 읽은 후, 그 책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평가한다. 이런 과정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조금씩 책을 보는 안목이 생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주 꼼꼼하게는 아니더라도 한 번 선택한 책은 끝까지 다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방법은 어렵거나 고도의 지성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인내심을 요구한다.

  

   대학 시절 나에게 가장 좋았던 것은 교수님도 수업도 아닌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에 들어가면 어마한 양의 책이 있었다. 나는 수업이 없을 때 대부분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책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도서관 가장자리에 있는 책상들 중 하나를 잡고 책을 읽었다. 매 순간 집중해서 책을 읽은 것도 아니다. 멍하게 딴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기도 했고, 그냥 검은색 잉크를 보고 지나간다고 생각될 정도로 성의 없이 책을 읽는 경우도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은 노트에 자유롭게 글로 썼다. 그렇게 나는 글을 읽고 쓰는 사람으로 스스로 성장했다. 내가 읽고 쓴 대부분의 글들은 철학, 수학, 과학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나를 수학자나 과학자로서 훈련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를 과학철학 연구자이자 수학과 과학 애호가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가끔 나는 이렇게 묻는다. 내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문제를 풀던 그 시간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 다른 경험을 했다면 지금의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책들이 쌓여 있는 도서관 자료실이 아니라 학생들이 치열하게 공부하는 열람실에서 좀 더 수업 공부에 충실하거나 일찍부터 고등고시 준비를 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러나 나는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취직을 한 후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나의 감성과 취향은 잘 변하지 않아, 나는 아직도 몇 장의 종이에 출력된 수학과 물리학 문제를 풀면서 즐거워하고, 혼자 조용히 책 읽고 생각하거나 글 쓰는 시간을 즐긴다. 이런 시간이 나를 치유해 준다. 나는 이게 나란 사람의 완고한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의 아이들이 어떤 취향을 갖게 될 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의 부모님께서 나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과 같은 나의 취향과 감성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 나의 아이들에게 내가 누렸던 것과 같은 충분한 자유를 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