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읽기와 쓰기의 위안

강형구 2020. 3. 21. 11:19

 

   나는 경쟁에 매우 서툰 사람이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인간 세상에서는 끊임없이, 쉬지 않고 경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경쟁에서 언어는 대부분 순수한 도구로서 기능한다. 언어는 상대방과 싸우거나, 다른 상대방과 연합하는 데 사용된다. 또한 언어는 유희를 위해서도 빈번하게 사용된다. 가끔씩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토크쇼를 보면 출연자들이 얼마나 맛깔나게 언어유희를 하는지 모른다. 인간들끼리 육체를 이용해 서로 합법적으로 경쟁하는 것은 스포츠다. 사람들은 스포츠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서로 육체적인 경쟁을 한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언어적인 경쟁이다. 말을 잘하고 못하는 것은 오늘날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책이라는 존재는 나에게 다소 기묘한 느낌을 준다. 책 속에 담긴 문장들은 희귀하고 신기한 존재들이다. 왜 이런 문장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 문장들이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과, 더 구체적으로 말해 인간 세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극심한 경쟁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물론 책 역시 경쟁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학원에서도 책을 읽고, 유튜브 방송들에서는 구독자들을 위해 책을 대신 읽어준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교양을 풍부하게 하여 이를 대화에 활용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어쩌면 이와 같은 책의 실용적인 활용이 더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은 나에게는 약간 다른 의미를 갖는다. 책을 읽는 제법 긴 시간 동안 나는 책 속 문장들이 그리는 세계 속에서 위안을 얻고, 나는 그러한 위안 이외의 다른 것을 얻고자 하지 않는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무엇인가를 기억하거나 외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나는 많은 경우 책을 읽으면서 멍한 상태로 생각에 잠긴다. 내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그저 자유롭게 놔둔다. 그런 편안한 시간이 지속되면서 사회생활을 통해 누적되었던 스트레스가 풀린다. 이때의 사회생활이란, 초중고등학교에 다니는 것, 대학에 다니는 것, 군 복무를 하는 것, 직장 생활을 하는 것 등이다. 나에게 사회생활이란 피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자 나의 존재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늘 내게는 일종의 의무로서 남아 있다. 나의 생존과 자유를 위해 치러야 하는 부득이한 대가인 셈이다.

  

   나는 학교에서 행해지는, 경쟁으로서의 공부에서 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 적이 별로 없다. 그러한 공부는 나에게는 무엇인가 늘 불편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나에게는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의무 같은 것이었기에 나는 나의 의무에 성실하게 임하고자 했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 나는 그러한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도서관에는 무수히 많은 책들이 고대의 유물처럼 서가에 꽂혀 있었고, 나는 내가 이 책들을 모조리 다 읽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며 행복감을 느꼈다. 도서관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을 한 권 꺼내들고,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 옆 책상에서 하릴없이 그 책을 읽는 것은 참으로 태평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학점을 위해서, 경쟁을 위해서, 명성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나의 읽고 쓰기에는 현실적인 이유들 역시 존재한다. 원고료를 받거나, 연구비를 지원받거나, 연구실적을 쌓는 것은 매우 중요한 동기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은 나와 같은 사람이 글을 읽고 쓰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지 않는다. 경쟁을 잠시 잊은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 속에 침잠해 있는 시간이 만들어내는 달콤함과 행복함. 그래서 나에게 책은 잔소리하거나 현혹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위안과 기쁨을 주는 존재다. 몽상가이자 책벌레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내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계속 세상에 남기기 위해 책을 쓴다. 이 책들은 미래의 몽상가와 책벌레를 위한 일종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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