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과학을 철학함

강형구 2020. 3. 3. 08:45

 

   전염병이 나라를 넘어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요즘, 그저 조심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나는 그저 내게 주어진 일들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주 금요일(228)에 과학철학 종합예비시험을 치렀다.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3시간 동안 A4용지 5장을 손글씨로 빼곡하게 채우면서 나는 아직까지 나 스스로가 참으로 부족함을 느꼈다. 논술고사 이후에는 구술고사가 예정되어 있어, 틈틈이 과학철학과 관련된 여러 논의들을 다시금 살펴보고 있다. 이제는 잠시 미뤄두었던 스몰린의 책 번역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조만간 라이헨바흐의 [상대성 이론의 공리화]가 출간될 것이다. 그의 책 [경험과 예측]을 번역하고 나면 나는 스스로가 박사학위논문을 쓸 자격을 어느 정도 갖추었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수학과 과학을 잘하고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수학과 과학에서의 논의는 내게는 일종의 음식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논의를 들으면서 나는 계속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까? 대체 그 법칙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의미에서 그 법칙이 타당한 것일까? A라는 법칙이 B라는 법칙과 연결되었을까? 과학의 역사 속 사건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의 이런 딴 생각’(좋게 말하면 메타적인 생각)에 빠지는 기질이 나로 하여금 과학이 아닌 과학철학을 하게끔 이끌었을 것이다.

  

   내가 딴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이런 딴 생각을 하는 수학자나 과학자들에게 애정을 갖는다. 나에게 딴 생각을 하는 수학자나 과학자란, 수학과 과학의 역사에 대해 자발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고, 수학과 과학의 의미와 발전에 관해 자기 나름대로의 관점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복사기와는 다르다. 내게 복사기란 현재 지배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수학과 과학의 역사 서술과 의미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재생산하는 사람들인데, ‘복사기는 수학자나 과학자가 될 수도 있고 수학과 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고급 사양의 복사기보다는 약간 어설프고 엉뚱하더라도 딴 생각하는 사람을 더 선호한다.

  

   ‘복사기의 말을 듣거나 글을 읽으면, 죄송하게도 나도 모르게 하품이 나고 지루함을 느낀다. 그런데 딴 생각하는 사람의 말을 듣거나 글을 읽으면, 그 말을 계속 듣고 그 글을 계속 읽어도 지루하지가 않다. 내가 인하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인 차동우 교수님의 물리학 강의를 계속 찾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물리학의 역사와 의미에 대한 차동우 교수님의 서술이 서양학자들의 논의보다 덜 섬세하고 덜 예리할 수는 있겠지만, 나는 교수님의 서술에서 깊이 거듭 고민한 흔적을 찾는다. 이러한 서술은 그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찾아내고 다듬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저 남들에게서 가져온 것과는 다르다. 물론 교수님의 서술이 완벽한 것도 아니고 나와 의견이 다른 부분도 분명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교수님이 남긴 물리학 교재, 강의록, 영상 강의, 번역서들이 우리나라의 물리학 이해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이것은 전문분야에서의 학술적 공헌과는 다른 것이다.

  

   20201학기 KMOOC 강의에서도 차동우 교수님의 물리학 강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번이 나에게는 3번째 수강이다. 작년에 차동우 교수님을 직접 뵙고 식사를 했던 일이 기억난다. 식사 후 버스터미널까지 차를 태워주시는 교수님께 내가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교수님께서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나에게 격려를 해주셨다. 비록 내가 전문적인 물리학 논문을 쓰지는 못하더라도, 나는 과학을 철학하는 사람으로서 교수님과 함께 과학의 발전, 의미, 가치에 대해서 대화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