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밑천을 쌓는 시간

강형구 2020. 5. 23. 17:39

   과학관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은 일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번 계측영상장비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물리실험 및 사진에 관한 책들을 읽었고, 이번 기하학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기하학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다. 이런 책들을 읽으면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다시 한 번 다져지고 내가 몰랐던 것들이 그 위에 덧붙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개인적인 성장 위에서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들, 예를 들어 전시 준비를 하거나 과학기술자료를 정리하는 일들을 한다. 솔직히 나는 아직까지 내가 학예사로서, 연구원으로서 일을 뛰어나게 잘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하면서 나 자신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고 느낀다.

 

   최근 우리 과학관에도 박사급 인력들이 다수 입사했다. 박사란 다름 아니라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사실 나는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과학사와 과학철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지금도 계속 공부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공부할 것이며, 과학관의 과학사 과학철학 전공자로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에, 과학사 과학철학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역량 구비라는 것이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니다. 꾸준히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이 전부다. 그런데 막상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이러한 단순한 일을 틈틈이 하는 것이 그다지 쉽지는 않다. 행정 업무가 상당하고, 조직 내에서의 인간관계도 제법 복잡하다. 의지를 갖고 실천하지 않으면 자기 전공 분야의 지식을 다지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가장 좋은 것은 나의 전공과 연관 짓는 방식으로 나의 업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하학 특별전을 한다면, 특별전을 계기로 삼아 기하학 발전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이를 전시 콘텐츠에 녹여내려고 노력한다. 내가 기우항 교수님을 알게 된 것을 참으로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기우항 교수님의 몇몇 논문들이나 기고문들은 오롯이 기하학 전체의 역사, 기하학의 발전 방향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글들을 읽으면 저절로 수학사 공부가 된다. 물론 나는 기교수님의 전문적인 미분기하학 논문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교수님께서 저술하신 수학 관련 저서들을 수집하는 것을 계기로 삼아, 교과서적인 수준에서만이라도 미분기하학을 공부할 수 있다. 그리고 미분기하학은 과학철학, 특히 물리철학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과학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보면 가끔씩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예를 들어 조만간 나는 경북 영천에 있는 최무선과학관에서 3회 정도 강의를 할 예정인데, 강의에서는 갈릴레오와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이야기할 생각이다. 강의를 계기로 다시 한 번 관련 문헌들을 찾아보고 갈릴레오와 아인슈타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하반기에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작년에 번역 출간한 [나우 : 시간의 물리학]에 대해 강연을 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 강연을 계기로 다시 한 번 [나우]를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나우]는 지금 내가 번역하고 있는 책인 [다시 태어난 시간]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시간, 공간, 인과성의 문제는 내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주제들인데,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 계속 읽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는 이렇게 조금씩 성장한다. 성장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과는 다르다. 조금씩 더 잘 알게 되고, 더 잘 하게 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 더 잘 못하더라도, 조금씩 성장하다보면 잘 하게 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잘 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잘 하는 것은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스스로 더 잘 하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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