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과학 강연계의 꼬꼬마

강형구 2020. 6. 6. 20:03

   어제 오후부터 코로나 감염의 위험 때문에 갑작스럽게 자가격리를 하게 되었다. 가족들과 격리되어 나 혼자 방 안에 있으면서 딱히 할 일이 없어 유튜브 강의를 보았다. 이종필 교수님의 [일반인을 위한 일반 상대성 이론], 김항배 교수님의 [빅뱅에서 쿼크까지 : 특수 및 일반 상대성 이론 ], 김상욱 교수님의 [뉴턴의 세계에 균열이 생기다], 이갑수 선생님의 [일반 상대성 이론] 강연 등등. 다들 참으로 훌륭한 강연이었고, 강연마다 각각의 장점이 있었다.

 

   이종필 교수님의 강연은 물리학적으로 자세했고 정확했다. 특히 쌍둥이 역설에 대한 물리학적 설명(도플러 효과를 이용한)이 훌륭했다. 김항배 교수님의 강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중력장 아래에서 자유 낙하하는 계 역시 일시적이고 국소적인 관성계로 볼 수 있으며, 등가 원리는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부터 관성계의 외연을 확장하는 의미를 갖는다는 설명이었다. 이는 시중의 일반 상대성 강의에서는 찾기 어려운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김상욱 교수님의 강연이 갖는 장점은 세련된 발표 자료를 토대로 문제가 되는 주제에 대한 간결하고 감칠맛 나는 설명을 제시한다는 것이었다. 이갑수 선생님의 강연에서는 단계적이고 상세한 수식 전개가 눈에 띄었다. 계산 과정을 하나하나 제시함으로써 수학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상대성의 수학을 조금씩 따라갈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내가 [나우 : 시간의 물리학]을 번역한 것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출판사에 다니던 후배가 번역을 부탁하기 전까지 나는 리처드 뮬러가 누구인지도, 그가 무슨 책을 썼는지도 몰랐다. 그 전까지 나는 내가 전공해서 공부한 라이헨바흐의 책들을 번역했을 뿐이다. 그렇게 우연히 번역한 [나우]가 우수도서에 선정되었고, 작년에는 이 책에 관해서 과학책방 [갈다]에서 강연을 했고, 올해에는 이 책과 관련해 조만간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강연을 할 예정이다.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나는 평소에 조용하게 살고 싶어 하는 편이다. 하지만 굳이 들어오는 일을 막지 않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이 강연이라니! 잘 하지도 못할뿐더러 별로 재미도 없을 텐데!

 

   재미있는 것은 강연자인 나의 정체성이 약간 애매하다는 것이다. 우선 나는 역자이지 저자가 아니다. 즉, 책을 번역하기는 했지만 책을 직접 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책의 주장이 곧 나의 주장인 것은 아니다. 또한 나는 과학자가 아니라 과학철학 전공자이고, 아직 박사학위가 없기 때문에 나를 과학철학 ‘전문가’라고 하기에도 약간 애매하다. 게다가 나는 과학자가 아니라 과학 애호가다! 어떤 방식으로 강연을 해야 할까? 과학철학 전공자의 입장에서 이 책을 논평하는 형태의 강연을 할까? 아니면 시간 흐름의 실재성에 관한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들을 소개하면서 그 중의 한 입장을 편들어 옹호할까? 여전히 고민 중이다.

 

   이럴 때 마감 시간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언젠가는 강연하는 날이 올 것이고, 나는 그때가 되면 내가 준비했던 자료로 어떻게든 강연을 하겠지. 의도하지 않게 과학강연계의 꼬꼬마가 되어 강연을 하게 되었지만, 나는 늘 그랬듯 내게 찾아온 기회를 즐기기로 했다. 사람들이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초보의 입장, 과학 전문가가 아니라 과학 애호가의 입장에서 강연하게 되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나는 앞으로도 나에게 들어오는 강연 요청을 거부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번의 경우 강연을 수락하는 것이 [나우]의 저자인 리처드 뮬러에 대한 역자로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누군가가 나에게 아인슈타인, 라이헨바흐, 상대성 이론에 대한 초기의 철학적 해석들,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서 강연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일 것이다. 우선 현재를 즐기자. 이번 기회를 계기로 [나우]에서의 논의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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