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전달자

강형구 2020. 3. 28. 01:39

 

   사자에게는 사자가 할 일이 있고, 개에게는 개가 할 일이 있다. 위대한 사람에게는 위대한 사람이 할 일이 있고, 평범한 사람에게는 평범한 사람이 할 일이 있다. 만약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괜히 위대한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흉볼 생각하지 말고 그저 내가 할 일을 하자. 나는 그냥 나의 삶을 살자. 나는 이와 같은 신조를 가지고 살고 있다.

  

   이제 나에게 공부라는 것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싸움이 되었다. 뛰어난 연구 업적을 쌓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었던 연구를 계속 해 나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과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 철학적 탐구가 과학 속에서 차지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서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그런데 그 오랜 고민도 최근 들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철학적 탐구가 과학 속에서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와 같이 철학적으로 과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역할은 그와 같은 철학적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잊히지 않도록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이다.

  

   세월 속에서 세상은 무섭게 변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내가 남긴 이야기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망각되더라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나의 이야기 속에는 여러 사람들이 등장한다. 임마누엘 칸트, 앙리 푸앵카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다비트 힐베르트, 모리츠 슐릭, 에른스트 카시러, 헤르만 바일, 한스 라이헨바흐, 루돌프 카르납, 필립 프랑크, 쿠르트 괴델.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유럽의 진지한 지성들. 한국인인 내가 왜 하필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매료되었을까. 그것은 사회적인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중고등학생이었을 당시에 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들을 시중의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수학과 과학에 대해 제법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고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보다 더 깊은 무엇인가를 찾는 학생이라면 자연스럽게 이들에 관해 쓰인 책들을 찾을 수 있었다. 되돌아보면 1982년생인 나의 지적인 관심사가 형성된 것의 유래는 사회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관심사가 흔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의미, 수학기초론과 괴델의 불완전성정리가 갖는 의미 등과 같은 주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그러한 사람들이 쓰거나 번역한 책들을 읽었다. 어쩌면 나는 일종의 후계자인 셈인데, 내가 학생일 때와 비교하면 이와 비슷한 부류의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수가 좀 더 적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앞으로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명맥을 잇는다는 것이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지 않은 우여곡절들을 겪으면서 나는 오직 끈질김만으로 계속 공부를 하고 있다. 이제 나는 나의 학문적 역량에 대해서, 내가 이 분야에서 인정받는 것에 대해서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내가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갈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과학사 시험, 이론철학 시험, 과학철학 종합예비시험에서 겨우 통과했다. 이제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여 집필해야 한다. 내게 박사학위란 내가 알고 싶어 했던 이야기를 더 잘 알도록 만들어 주는 일종의 통과의례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그 이야기를 더 잘 알게 되어야만 훗날 내가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성실함을 다해 나의 이야기를 전할 것이다. 말이 어눌하고 말주변이 없는 내가 이야기 전달자라니. 나도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야기 전달자이다. 아주 우연히 학생 시절 내게 찾아온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이야기 전달자. 이야기 전달자이지 이야기꾼은 아니라는 것이 함정 아닌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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