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145

논리경험주의의 역사와 철학 연구

1950년대에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유엔 원조를 받았고, 원조 물품 중에는 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라이헨바흐의 대중적인 책 [The Rise of Scientific Philosophy](1951년)는 유엔 원조와 함께 우리나라로 유입됐다. 이 책을 최초로 번역한 학자는 전두하 선생이었다. 이때는 미국에서 논리경험주의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논리경험주의가 거의 ‘죽은’ 것으로 평가되었던 197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슐리크, 라이헨바흐, 카르납의 저술들이 본격적으로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번역된 책들도 있긴 했지만, 그 책들은 당대의 과학철학자들로부터 그 진가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미 당시에는 영국 런던정경..

과학철학 연구자의 자리

예전부터(1984년부터) 있었던 서울대학교의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대학원)은 최근 과학학과(대학원)로 바뀌었다. 과학학과로의 개편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과학학과가 학부 과정에서부터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학부에서 자연과학, 공학, 인문학, 사회과학 등을 배운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대학원에서 과학학을 공부하면 된다. 그런데 과연 과학학(Science Studies)이란 무엇인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과학의 역사와 철학이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대학생들의 관점에서는 과학의 역사와 철학을 함께 공부할 때 과학을 더 친숙하게 여기고 과학의 내용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과학기술정책이 있다. 우리나라를 이제 과학기술 선진국이라고 볼 수 있을 ..

강형구, 과학철학의 친구

최근에 나는 국내의 2개 철학 학회로부터 학술 논문심사 의뢰를 받았다. 내가 논문심사를 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논문심사를 끝냈다. 나의 박사학위 논문 또한 그 초고가 완성되었다. 이 초고가 논문심사 과정에서 얼마나 수정될 것인지 지금으로서 잘 알 수 없지만, 초고를 계속 수정해나가면 졸업은 가능하리라고 예상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졸업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나는 내가 뛰어난 과학철학 연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 역시 우리나라 과학철학의 연구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 그래서 학위를 받은 이후에도 계속 과학철학 연구 활동에 참여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계속 논리경험주의 과학철학(한스 라이..

과학으로부터의 자유

내가 서점과 도서관을 좋아했던 것은 그 속에서 일종의 ‘자유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서점과 도서관에는 교과서가 아닌 다양한 책들이 있었고, 나는 그러한 여러 책을 훑어보며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마음대로 골라서 읽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서점과 도서관에서 느낄 수 있는 생각의 다양성과 자유로움이 내 마음을 이끌었던 것 같다. 특히 내가 도서관을 좋아했던 것은 그곳에 베스트셀러 이외의 책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래전 발간되어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않고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은 나에게 이유 모를 애정을 느끼게 했다. 나는 도서관 열람실보다는 자료실의 서가가 좋았고, 자료실 구석에 놓여 있는 책상에서 책 읽는 것이 좋았다. 돌아보면 그것은 참 한가한 시간이었다.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생각을 장려하는 사상가, 푸앵카레

어떤 점에서는 비범하게 뛰어나지만 다른 많은 측면에서는 아주 어설퍼서 더 정감이 가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푸앵카레다. 푸앵카레의 글을 읽으면 그가 아주 독창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사상가임을 알 수 있다. 그의 글은 아주 솔직해서 그의 글을 읽으면 그 글이 곧 그의 진실한 생각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푸앵카레는 자신의 글 속에서 아주 근본적이고 진지한 사고를 전개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푸앵카레의 문체는 ‘탐구하고 모색하는 것’이다. 그는 ‘이미 내가 확고하고 명확한 지식을 알고 있고, 그것을 글을 읽는 독자에게 전달하겠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는 강연이나 기고를 자기 고유의 사고를 전개하고 발전하는 계기로 삼는다. 그래서 그의 기고문을 읽거나 강연을 듣는 사람들은, 자신의 앞에서 한 ..

철학을 사랑한다면

내가 아는 과학철학 연구자들의 경우 학부 때부터 철학을 전공한 사람은 별로 없다. 학부 시절 물리학, 화학, 기계공학, 컴퓨터공학 등을 전공한 사람들이 대학원에 입학한 후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나는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그때부터 세부 전공이 과학철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대다수의 과학철학 연구자들과 약간 다르다. 철학이라는 학문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학과 폐지, 학과 통폐합 등등의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한국에서 철학과는 살아남아 있다. 그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철학을 필요로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전공은 서양현대철학 중 과학철학이고, 나는 내가 전공하는 철학이 여러 철학들 중에서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지 않다. 그러나 ..

수학에 대한 단상

이상원 교수님의 책 [객관성과 진리 : 구성적, 다원적, 국소적 관점]을 흥미롭게 읽었다. 이제 나는 4월 말까지 수학을 공부할 예정이다. 나에게 수학 공부란, 수학사 책도 읽고 수학 교과서도 읽으며 때때로 수학 문제들을 푸는 것이다. 수학 공부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다. 모름지기 공부란 즐겁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나의 이해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문제를 빨리, 잘 풀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수학에 대한 나의 이해가 증진되면 된다. 박사학위 논문 작성과 관련하여 수학 공부를 하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기하학의 기초에 관한 리만(Riemann)과 헬름홀츠(Helmholtz)의 생각을 직접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두 사람의 생각에는 수학적 통찰과 인식론적 통찰이 섞여 있고, 독자에 따라 수..

과학적 철학과 철학의 자연화

일반적으로 ‘과학적 철학(scientific philosophy)’ 개념은 논리경험주의자들이 제시했고, ‘자연화된 철학(naturalized philosophy)’ 개념은 하버드 대학 출신의 미국 철학자 윌러드 콰인이 제시했으며, 콰인은 논리경험주의에 결정적인 반박을 가한 인물로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최근 나는 관련 문헌들을 읽으면서 실제로 콰인의 입장은 논리경험주의 전체가 아닌 카르납의 입장에 대한 반박이었으며, 라이헨바흐가 제시한 ‘과학적 철학’ 개념은 콰인의 ‘자연화된 철학’ 개념과 그다지 상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두 개념이 완전히 같지는 않고 세부적인 측면들에서는 당연히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두 개념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 같다.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논..

1920년대 후반기의 자연철학

상대성 이론의 철학적 의의에 대한 아인슈타인-라이헨바흐 논쟁을 검토한 후, 요즘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주제는 ‘1920년대 후반기에 과학철학자들이 생각했던 과학철학 혹은 자연철학의 역할과 기능’이다. 당시 많은 수의 학자들이 이 주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펼쳤는데, 내가 특히 중점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슐리크, 라이헨바흐, 카르납의 견해이다. 1930년대 초반부터 나치즘을 피해 유럽의 과학철학자들이 영국, 미국 등지로 이주를 하게 되는데, 그와 같은 이주 직전까지 이들이 과학철학(자연철학)의 기능과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를 들여다본다. 디테일(세부사항)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부쩍 많이 하게 된다. 100년과 같이 긴 시간 간격이 아니라 순차적인 시간 속에서 들여다보면 단절성보다는 연속..

논리경험주의 드라마

휴직 후 집안일과 애들 돌보기를 주로 하고 있는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드라마는 "논리경험주의" 드라마다. 어떻게 그런 드라마가 가능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20세기 전반기의 과학철학사를 연구하는 나에게 이보다 더 흥미로운 드라마는 없다. 철학사조로서의 논리경험주의를 서술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논리경험주의자들의 특징적인 면모를 기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리크 슐리크는 막스 플랑크 아래에서 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철학으로 전향했다. 플랑크의 회고에 따르면 슐리크는 매우 뛰어난 제자였다. 필립 프랑크는 어떤가? 프랑크 또한 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철학으로 전향했다. 오토 노이라트는 경제학자였고, 한스 한은 수학자였다. 한스 라이헨바흐는 철학으로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