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123

회전, 돈다는 것

회전(回轉, spin). 어떤 물체가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 물체는 자신이 아닌 다른 물체 주변을 돌 수도 있고, 그 자신을 하나의 축으로 삼아 돌 수도 있다. 그런데 물체는 왜 도는 것일까? 물체가 도는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한 물체는 다른 물체 주변을 다양한 방식으로 돌 수 있다. 다른 물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일정한 빠르기로 돌면, 그 물체의 궤적은 동그란 원이 된다. 그런데 대체 왜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일정한 빠르기로 돈단 말인가? 물체에 그렇게 돌고자 하는 본성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일상적인 비유를 들자면, 내가 튼튼하고 가는 줄로 다른 물체를 매달고 힘을 써서 돌리는 것처럼, 두 물체 사이에는 일종의 힘이 작용하는 것 아닐까..

권위보다는 자유를, 환상보다는 상식을

내가 철학적인 글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것이 읽는 이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이로 하여금 함께 생각해보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연 세계의 본질을 기술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기여를 하고 있는 두 학문은 수학과 물리학일 것이다. 그리고 전문적 학문인 수학과 물리학을 잘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지적 재능이 요구되는 것이 사실이다. 머리가 똑똑한 사람이 수학과 물리학을 잘 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나 나는 수학과 물리학의 본질적인 개념들을 ‘이해’ 혹은 ‘납득’하는 데에는 유별나게 특출한 지적 재능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건전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개념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철학이 특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

바일의 리만 공간 개념 확장에 대한 라이헨바흐의 비판

[시간과 공간의 철학]의 부록 내용 중에서 발췌했다. 따라서 중력에 대한 기하학적 표상은, 만약 이것이 실제로 측정 도구들과 중력장 사이의 관계를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시각화의 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경험적 주장은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이 갖는 인식론적 가치의 기초이다. 중력에 대한 기하학적 해석은 단지 사실적인 주장을 둘러싸고 있는 시각적인 외투에 불과하다. 몸체와 그 몸체를 둘러싸고 있는 외투를 혼동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몸체를 둘러싼 외투의 형태로부터 몸체의 형태를 추론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동일한 작업을 전기 현상에 대해 하길 바란다면, 우리는 전기장을 측정 도구들의 행태와 관계 짓는 유사한 물리적 사실을 찾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전기장에 대한 기하학적 표현이..

일반 상대성에 대한 초기의 철학적 해석들

토머스 리크먼, “일반 상대성에 대한 초기의 철학적 해석들”(2018. 5. 7.)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에서 Thomas Ryckman, “Early Philosophical Interpretations of General Relativity” from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18. 5. 7.) 일반 상대성 이론에 관한 초기의 철학적 해석들은 네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① 마흐주의자 : “관성의 상대화”를 실현했다고 본다. 원거리 동시성을 조작주의적으로 취급했음을 높게 평가한다. ② 칸트주의, 신칸트주의 : 종합적인 “지성적인 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형식이 다름 아닌 일반 공변성의 원리라는 것이다. ③ 논리경험주의 : 물리적 이론의 경험적..

시공간철학 강의를 끝내며

어제(2020. 12. 7.) 강의는 2020년 2학기 시공간철학 수업의 공식적인 마지막 강의였다. 이번 수업을 통해 데이비드 흄과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적 시간 공간 이론, 시간과 공간에 대한 에른스트 마흐와 앙리 푸앵카레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 논문을 읽었고, 아인슈타인의 자신의 철학적 견해들을 읽었다. 상대성 이론이 제기한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에른스트 카시러, 버트런드 러셀, 모리츠 슐리크, 루돌프 카르납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폈고, 최종적으로 한스 라이헨바흐의 시공간철학에 대해 3주에 걸쳐서 검토했다. 다음 주에는 ‘시간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편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나는 시공간철학 수업의 조..

멍청한 질문들을 계속 하는 것

나는 오래 전부터 멍청한 질문을 계속 해 오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겠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데카르트가 해석 기하학을 발명했다는 사실로부터 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떠올렸다. 그림처럼 상상할 수 있는 혹은 도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기하학적 문제들을 해석 기하학의 언어로 공식화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해, 우리가 시각적 이미지를 이용하여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기하학의 문제들을 해석 기하학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당시의 온라인 커뮤니티였던 [수학사랑]에 올렸는데, 이에 대한 대답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이상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의미가 있는 질문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상대성 이론에 대한 글들을 읽고 있는 요즘 나는 여전히 계속 멍청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예를 ..

초보 연구자

과학사와 과학철학 연구자로서 나의 전문 연구 분야는 20세기 전반기의 과학철학 역사이다. 20세기 전반기의 중요한 과학철학 분야로는 수리철학과 물리철학이 있다. 이 시기에는 수학의 기초에 관한 철학적 논의가 활발했다. 수학을 논리의 바탕 위에 두려는 논리주의(화이트헤드, 러셀), 수학의 기초를 형식적인 공리 체계로 보려는 형식주의(힐베르트), 수학을 인간 이성의 직관적 추론 능력 위에 기초하려는 직관주의(브라우베르, 바일)가 서로 경합을 벌였다. 20세기 전반기의 수리철학 논의들을 상세하게 들여다보고 그 철학적 함축을 상세하게 밝히는 학문적 작업이 필요한데, 우리나라에는 이를 연구하는 학자가 부족한 상황이다. 서울대학교의 박세희 교수, 연세대학교의 김상문 교수께서 수리철학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신 바..

시공간철학 수업을 준비하며

나는 과학관의 연구원이자 학예사다. 내가 과학관에 2017년 7월에 입사한 이후 네 번째로 준비하고 있는 기증품 특별전 ‘도형의 아름다움’의 전시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나간다. 전시 준비를 위해 기우항 교수님에 대한 책들과 논문들 및 기하학에 관한 책들을 읽었고, 기우항 교수님과 만나 대화를 여러 번 나누기도 했다. 이후 전시 스토리북을 직접 썼고, 그 스토리북을 토대로 전시 콘텐츠를 직접 만들었으며, 전시 공간과 분위기에 맞게 10번 정도 콘텐츠를 고쳤다. 전시를 위한 체험 전시품을 만들거나 빌렸다.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준비해서 만든 전시다. 물론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가 끝난 후의 또 다른 전시를 기약한다. 학예사가 하는 일은 전시를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등가 원리에서 휘어진 시공간으로

어제(2020. 9. 11.) 유튜버 과학쿠키님과 기우항 교수님 자택에서 만나 이번 기증품 특별전 전시 해설 영상에 들어갈 기우항 교수님의 인터뷰 영상을 촬영했다. 이후 서울로 이동해야 하는 과학쿠키님을 동대구역까지 배웅하며 우리는 1907년 이후 아인슈타인의 추론 과정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나눈 토론이 이 주제에 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07년에 스위스 특허청 사무실에서 아인슈타인이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생각’을 떠올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일정한 중력장 아래에서 자유 낙하하는 사람 A와, 중력장에 의해 속박되어 지구 표면 위에 서 있는 사람 B가 있다고 가정하자. 우선 A와 B 모두 작은 방 안에 갇혀 있다고 상상한다. A는 자신이 자유 낙하하는..

과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푸앵카레의 저서 [과학과 가설]은 철학적 저술이었다. 어느 시대이든 과학적 지식은 특정한 종류의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예를 들어 17세기 말에 제시된 뉴턴의 물리학은 중력이라는 물리적 힘의 구체적인 작용 과정에 관한 철학적 문제, 뉴턴이 제시한 절대적 시간과 공간에 관한 철학적 문제를 제기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푸앵카레가 활동하던 무렵에는 과학을 `유명론'적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특정한 자연현상을 동등하게 기술할 수 있는 복수의 기호체계들이 존재한다면, 결국 그러한 각각의 기호체계는 자연을 반영한다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편리한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현상을 기술할 수 있는 수학적 기하학이 유일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