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논리경험주의의 역사와 철학 연구

강형구 2022. 8. 2. 16:36

   1950년대에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유엔 원조를 받았고, 원조 물품 중에는 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라이헨바흐의 대중적인 책 [The Rise of Scientific Philosophy](1951년)는 유엔 원조와 함께 우리나라로 유입됐다. 이 책을 최초로 번역한 학자는 전두하 선생이었다. 이때는 미국에서 논리경험주의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논리경험주의가 거의 ‘죽은’ 것으로 평가되었던 197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슐리크, 라이헨바흐, 카르납의 저술들이 본격적으로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번역된 책들도 있긴 했지만, 그 책들은 당대의 과학철학자들로부터 그 진가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미 당시에는 영국 런던정경대학의 포퍼와 라카토슈, 미국 하버드대학의 쿤을 중심으로 과학철학의 지형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학부에서 공학을 전공한 이정우 선생이 라이헨바흐의 [시간과 공간의 철학(The Philosophy of Space and Time)]을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에 번역했다(1986년경). 만약 그가 계속 과학철학을 연구했으면 좋았겠지만, 이정우 선생은 이 책을 번역한 후 푸코(Foucault)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라이헨바흐의 제자 위슬리 새먼(Wesley Salmon)이 쓴 [라이헨바흐]라는 제법 긴 소개의 글을 우정규 선생이 번역해서 출판했다. 우정규 선생은 귀납, 확률과 관련하여 연구를 하던 중 새먼과 라이헨바흐의 저술을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북대학교 철학과의 분석철학 전통에서 김회빈 선생이 라이헨바흐의 [The Rise of Scientific Philosophy]를 좀 더 훌륭하게 우리말로 번역했다. 최현철 선생 또한 이 책을 부분적으로 번역한 바 있다. 제주대학교 철학과의 윤용택 선생이 카르납의 원숙한 철학적 입장을 싣고 있는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science](과학철학입문)를 번역했다.

 

   현재 본격적인 ‘논리경험주의 역사 및 철학 연구자’로 불릴만한 사람을 우리나라에서 찾기 어렵다. 실제로 외국의 경우 또한 이 분야의 연구자 수가 비교적 적다. 우리나라 연구자의 논문에서 귀납, 입증, 확률과 관련하여 카르납의 논의가 빈번하게 등장하긴 한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철학사적인 관점에서 카르납의 주요 저술을 번역하고 이에 관해 연구한 학자는 거의 없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과학철학은 연구자의 수가 극히 적으므로 협동 연구로 인한 효과가 발생하기 어렵다. 대개 철학과 내에서도 특정 분야 연구자는 오직 한 명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특정 철학자에 대한 저명한 연구자는 제법 있다. 대표적인 예로 칸트 연구자 백종현 선생이 계신다. 이후 후학들이 배출되어 다른 연구자들이 계속 칸트 저작을 번역 및 연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칸트 연구를 위해 백종현 선생께서 노력하신 바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나는 라이헨바흐 연구자이기도 하면서, 좀 더 넓은 범위에서는 논리경험주의의 역사 및 철학 연구자가 될 작정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게 나의 가장 정확한 정체성이 될 것 같다. 내 생각에 우리가 21세기에 새로운 과학철학을 하려고 하더라도 그 기준은 논리경험주의의 과학철학이 되어야 한다. 나는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 포퍼, 라카토슈, 쿤의 과학철학이라 생각하지 않으며, 이들이 논리경험주의의 과학철학을 제대로 반박 혹은 극복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흄, 칸트의 저술들이 철학 분야에서 불멸의 저서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논리경험주의 특히 라이헨바흐의 저술들이 이후에도 불멸의 저서로서 남을 것이라 예상한다. 물론 이러한 예상은 시간이라는 냉정한 시험을 통과해야 할 것이며, 나 또한 이러한 통과를 위해 미력하나마 나의 힘을 보태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