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서울대학교 철학과 강진호 교수님의 퇴임사

강형구 2022. 8. 13. 10:31

   안녕하세요. 철학과 강진호 교수입니다.

   1.

 

   이미 소식을 들어 알고 있는 학생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저는 연구와 공부에 전념하고자 지난 1학기를 마지막으로 교수직을 사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7월에 사직서를 제출했고 행정적인 절차가 완료되어 이번 9월 1일자로 사직 처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서울대학교는 한국을 대표하는 대학이자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서울대학교 교수는 마땅히 세계적 수준의 연구와 교육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 나아감과 물러섬에 있어서 결코 성급하거나 경솔한 결정을 내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교수직을 사임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서 제 자신 오랫동안 깊이 숙고하고 고민한 끝에 이루어진 결정임을 알립니다.

   제가 2006년 9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부임하였으니 지난 1학기로 꼭 15년이 지났습니다. 15년의 기간 동안 저희 철학과는 특히 교육과 학문후속세대 양성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발전에 저도 일익을 담당했으며 이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제 능력의 한계로 인해 교수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연구 활동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더불어 제가 맡고 있는 교육과 학생 지도 및 학내외 행정 업무를 제 스스로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수행하는데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제 능력의 한계와 저의 업무 처리 성향을 냉정히 고려할 때, 제가 원하는만큼 연구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수직을 사임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철학이 아닌 다른 학문 분야의 전공자였다면 이런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철학은 순수 수학과 마찬가지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대규모의 재정적 지원 및 여러 연구자들의 협업이 필요한 실험 또는 데이터 수집/분석, 설문 조사, 현지 조사 등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순수 수학 분야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전문적인 철학 연구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깊고 끈질기고 치밀하게 생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기만의 시간입니다.

   그러한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고자 하는 열망을 끝내 누르지 못해, 저는 결국 교수직 사임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됐습니다. 제 강의를 수강하고자 계획했던 모든 학생들, 그리고 제게 지도를 받고자 계획했던 모든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며 널리 양해를 구합니다. 특히 지난 학기까지 저와 함께 했던 대학원 석박사과정 지도학생들에게 갖는 미안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부디 연구와 공부에 전념하고자 하는 저의 열망이 한낱 미망(迷妄)이 아니기를, 그리고 앞으로 제 연구 성과를 통해 장차 철학을 공부하거나 전문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2.

 

   보는 대로 믿고 욕구하는 대로 행동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신의 믿음과 행동에 대해 그 믿음을 왜 가져야 하며 그 행동을 왜 해야 하는지 물어보고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과 행동을 검토하고 반성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신의 믿음과 행동에 대한 근거 또는 이유를 물어보고 찾을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인간을 다른 모든 동물과 차별화해주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이성(reason)의 능력이란 바로 자신의 믿음과 행동의 이유(reason)를 물어보고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이성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우리의 믿음과 행동의 이유가 무엇인지 끝까지 추적했을 때 마주치게 되는 "진리란 무엇인가?", "지식이란 무엇인가?", "올바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 그리고 이 질문들을 개념화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진리", "지식", "올바름"과 같은 가장 근본적인 개념들, 이들이 바로 철학에서 탐구하는 질문과 개념들입니다. 이 질문들 및 개념들의 본성에 대한 답이 무엇이고 어떠한 방법을 통해 그러한 답을 찾을 수 있으며 도대체 답을 찾을 수는 있는 것인지에 대해 철학은 장구한 논의를 거듭했습니다만, 아직도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아무런 합의된 진리도 산출해내지 못한 철학적 탐구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지 회의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어떤 이들은 철학의 죽음을, 철학의 소멸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철학에서 논의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과 개념들이 다름 아닌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이성적 능력, 우리 자신의 믿음과 행동의 이유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 능력을 끝까지 발휘했을 때 다다를 수밖에 없는 질문들과 개념들이라면, 그리고 인간이 일단 자신의 믿음과 행동의 이유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이상 인간은 그러한 물음을 끝까지 추구할 수밖에 없다면, 철학은 결코 소멸될 수 없을 것입니다. 철학이 소멸될 수 있는 조건은 우리가 물어볼 수 있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거나 또는 우리가 물어볼 수 있는 능력을 아예 상실했을 경우뿐인데, 전자의 경우 인간은 신이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 인간은 동물이 될 것이므로 어느 경우에도 우리가 아는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철학은 소멸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철학적 탐구는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이 위대한 학문에서 연구되고 있는 문제들을 지난 15년간 서울대학교에서 최고의 인재인 여러분과 함께 고민하고 탐구해볼 수 있었던 것은 제게 커다란 기쁨이자 보람이었습니다. 강의실에서 지적 호기심과 열정에 가득찬 빛나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여러분의 모습을 저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배움에 정진하여 자신의 꿈을 꼭 이룰 수 있기를, 그리고 여러분 모두의 앞날에 무한한 발전과 행운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2021년 8월 31일

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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