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전통의 계승자

강형구 2022. 9. 10. 14:10

   오늘은 2022년 추석이다. 우리 가족은 어제 부모님이 계신 부산으로 이동하여, 오늘 아침 차례상을 차려 고조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추석 인사를 드렸다. 새로운 해가 시작하는 날(설날)과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는 날(추석)에 온 가족들이 모여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기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좋은 문화적 관습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설날과 추석의 본질이지, 차례상을 차리느라고 고생하거나 명절 때마다 친척들끼리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것은 그 본질이 아니다.

 

   나는 조상님께 절을 올리며 나의 박사학위 논문이 잘 통과되기를 빌었다. 내가 생각해도 분명 잘 쓴 논문은 아니지만, 그 누구처럼 다른 사람의 글을 허락 없이 베끼지는 않았다. 나의 논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직접 생각하여 나의 언어로 썼다. 물론 국제적인 학문 언어인 영어로 썼다면 더 좋았겠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나의 논문이 참고될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말을 고집했다. 설혹 나의 논문이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역할을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여러 혜택을 우리 사회로부터 받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학위논문으로 그 혜택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논문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나 싶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학사, 석사, 박사학위 논문을 모두 같은 과학철학자에 대해서 쓰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과도한 집착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몫이라 생각한다. ‘운명’이라는 단어는 좀 거창하고 무겁다. 그냥 이게 내 능력에 가장 적합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오래전에 서양의 학자들이 아랍어와 그리스어로 쓰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의 저술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소화했듯, 나 또한 이와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나도 나만의 위대하고 독창적인 사상을 제창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시기상조다. 모든 건 시기가 무르익어야 한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불쏘시개 역할을 해야, 이후 정말 진짜인 것이 우리 땅에서 태어날 것이다.

 

   아마도 나는 내 사후에, 한 명의 서양 과학철학자의 저술 대부분을 우리말로 옮기고 그에 대한 해설을 남긴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물론 때때로 다른 동시대 과학자들의 저술을 번역하는 일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나의 관점에서는 잠깐의 외도이자 우리 사회의 과학 문화 활성화를 위한 좀 더 직접적인 노력이다. 그리고 나의 번역은 일종의 ‘과도기적’인 결과물이라고 평가될 것이다. 독일어와 물리학에 대한 나의 지식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나의 번역이 갖는 이러한 ‘과도기적 특성’을 보완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 굳이 더 좋은 번역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나와 비슷한 수고를 하지는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언어란 얼마나 강력한 문화적 산물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모국어를 세계 곳곳에 퍼트리는 것이다. 서양 세계에서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가 세계의 공용어 역할을 했듯, 나는 먼 훗날 한국어가 세계의 공용어가 되기를 꿈꾼다. 이런 꿈을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말이 다른 나라 말에 의해 잠식되지 않도록, 우리말을 더 아끼고 자주 쓰고 잘 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를 잘하면 좋다. 그래도 늘 다른 나라 말들로부터 우리말을 위한 것들을 빼앗아와야지, 우리의 것을 뺏기면 안 된다.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농사를 짓는 이유를 물어서 무엇하나.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 나이 먹도록 이 일만 하면서 살아왔기에 이제 더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저 나는 내 삶을 통해, 내가 만들어내는 산물을 통해 나의 삶을 소소히 증명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