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과학에 대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강형구 2022. 9. 19. 20:57

   생각해보면 나는 그저 과학에 대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에 쓰인 내용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많은 문제를 빨리 풀라고 하거나, 의미를 알 수 없고 어렵기만 한 문제들을 풀라고 했다. 그냥 나는 그게 성에 안 찼다. 적성에 맞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 도서관에 가서 과학에 관한 책들을 빌려 읽었다.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는 그런 이유로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하이젠베르크에게 유혹되었다. 그러니까 잘못 낚인 거다. 그리스의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낚였던 것처럼 말이다.

 

   8월 말에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선생님과 저녁 식사를 하며 2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고깃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토론을 들으며 조금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그 토론에서 선생님께서는 내가 생각하는 과학철학을 굳이 철학자가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과학철학은 철학자들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직접 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학 기초론이나 물리학 기초론은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하면 된다. 그 선생님은 과학의 기초(foundation)에 대한 논의는 과학자들에게 맡기고, 철학자는 과학자들이 할 수 없는 특별한 종류의 작업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나는 그 말씀에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물리학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에 과학고등학교에 입학했었고, 고등학교 생활을 하며 대략 이공계 대학(예를 들어, 카이스트)에서 어떻게 공부하는지 감을 잡았다. 내가 만약 오늘날의 한국과학영재학교에 입학했다면 나의 진로는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는 철학, 과학사, 과학철학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철학 과목이 없었다. 당시 한 국어 선생님께서 러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철학의 문제들)]를 읽으라고 했는데, 황당하게도 그때의 과제가 그냥 그 책을 읽고 책의 요약문을 제출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어떤 토론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러셀의 글을 읽으며 상당한 자극을 받았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고려대학교 김종오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포항공대 임경순 교수님께서 편역하신 [100년 만에 다시 찾는 아인슈타인]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때도 나는 아인슈타인한테 낚였다. 특히 임경순 교수님의 책에는 “나의 비망록”이라는 제목을 단 아인슈타인의 자서전적 회고록이 수록되어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이미 그런 글들을 읽었다고 자랑하는 게 아니다. 내가 생각했던 과학철학은 이렇듯 하이젠베르크, 러셀, 아인슈타인과 같은 수학자 혹은 물리학자의 사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읽은 인물들의 글들은 철학적인 글들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과학철학은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학창 시절 몰두해서 읽었던 애런 베른슈타인의 과학 전집, 아인슈타인이 친구들과 흄과 마흐와 푸앵카레를 읽고 토론한 것, 무명의 공학자인 미셸 베소와의 토론, 아인슈타인의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생각’이라 했던 등가 원리 사고 실험과 회전 원판 사고 실험, 물리학 이론에서(특히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좌표계가 직접적인 측정의 의미를 잃는다는 점을 깨달은 것, 젊은 하이젠베르크가 아인슈타인의 철학적 입장을 실증주의적인 것으로 오해하여(파울리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의 행렬역학을 개발하는 추동력으로 삼은 것.

 

   분명 많은 과학자는 철학 없이 과학을 할 수 있지만, 몇몇 과학자들에게는 철학적 사고가 과학만큼이나 중요하다. 문제는 그 몇몇 사람들에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인슈타인이 가졌던 철학적 호기심이 인간에게는 비교적 보편적인 호기심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극히 평범한 지성을 가진 나 또한 그런 진지한 문제들이 몹시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과학철학은 과학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닥치고 계산’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