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과학으로부터의 자유

강형구 2022. 6. 16. 11:14

   내가 서점과 도서관을 좋아했던 것은 그 속에서 일종의 ‘자유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서점과 도서관에는 교과서가 아닌 다양한 책들이 있었고, 나는 그러한 여러 책을 훑어보며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마음대로 골라서 읽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서점과 도서관에서 느낄 수 있는 생각의 다양성과 자유로움이 내 마음을 이끌었던 것 같다.

 

   특히 내가 도서관을 좋아했던 것은 그곳에 베스트셀러 이외의 책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래전 발간되어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않고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은 나에게 이유 모를 애정을 느끼게 했다. 나는 도서관 열람실보다는 자료실의 서가가 좋았고, 자료실 구석에 놓여 있는 책상에서 책 읽는 것이 좋았다. 돌아보면 그것은 참 한가한 시간이었다.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미래의 취업에 무관심했던 나는, 그저 딱히 시간을 보낼 곳이 없어 도서관을 떠돌다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꺼내 들어 마냥 읽어나가곤 했다.

 

   사실 성실함이라는 것은 그런 나의 행위를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위한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세상에는 어디서든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학과 내에서도 학생들이 학점을 잘 받기 위해 애를 썼고, 필요하면 재수강과 삼수강도 마다하지 않았다. 철학과가 취업에 불리하다고 생각한 학생들은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을 했고, 전과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제도 속 경쟁이 필요함 인정했지만, 그것을 내 안에 내면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일종의 ‘의무’였지만, 그 의무가 나의 본질을 규정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으름, 한가함, 자유로움의 존재를 긍정하라. 그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강렬한 행복이자 사치다. 어디서든 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끝없는 경쟁이 이루어진다. 심지어 학문의 세계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걸까? 그렇게 경쟁에 매몰되는 것은 어쩌면 무엇인가에 이용당하는 게 아닐까? 느긋하고 한가한 시간에 자유롭게 생각에 잠기며 인생의 의미를 따져보는 것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고상함 아닌가? 아무리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경쟁에 매몰되어 철학이나 수학, 물리학을 해 나간다면 나는 그 사람이 부럽지 않을 것 같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다양하고 다채로운 자연 현상에 대한 관심이 자연과학으로 나를 이끌었다. 어려운 자연과학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에 깃들어 있는 역사와 사상을 알고 싶어 과학사와 과학철학 책을 찾았다. 나는 그저 나와 같이 자연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을 공유하는 여러 사람의 생각을 알고 싶었을 뿐이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인간 조직이 유지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식의 경쟁이 필요하며, 내가 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인간적인 행복을 주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한가함, 여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자유다.

 

   과학철학과 관련해서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독자에게 과학을 생각하는 자유 혹은 여유를 주는 일이다. 예를 들어, 과학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여러 이야기를 함으로써 독자가 과학을 좀 더 잘 혹은 친숙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은 어쩌면 독자에게 과학을 생각하는 자유 혹은 여유를 준 셈이 된다. 과학의 내용에 매몰되거나 과학의 내용을 맹신하지 않고, 한 명의 지성적 인간으로서 과학을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그 의미를 음미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과학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누리는 것이 될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이나 기술을 피할 수 없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게 오늘날 인간이 직면한 현실이라면, 과학을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며 그것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을 과학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과학철학은 인간을 과학에 매몰되지 않고 이로부터 자유롭게 만든다. 이는 철학의 아주 오래된 임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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