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철학을 사랑한다면

강형구 2022. 3. 30. 11:25

   내가 아는 과학철학 연구자들의 경우 학부 때부터 철학을 전공한 사람은 별로 없다. 학부 시절 물리학, 화학, 기계공학, 컴퓨터공학 등을 전공한 사람들이 대학원에 입학한 후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나는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그때부터 세부 전공이 과학철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대다수의 과학철학 연구자들과 약간 다르다.

 

   철학이라는 학문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학과 폐지, 학과 통폐합 등등의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한국에서 철학과는 살아남아 있다. 그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철학을 필요로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전공은 서양현대철학 중 과학철학이고, 나는 내가 전공하는 철학이 여러 철학들 중에서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볼 때, 철학이라는 범주 내에서 여러 논쟁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종류의 철학이든 그 고유의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양 철학, 동양 철학, 한국 철학, 고대 철학, 중세 철학, 근대 철학, 현대 철학, 예술 철학, 문학 철학, 기술 철학 등등 아주 다양한 종류의 철학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철학이다.

 

   나는 앞으로도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물론 계속 다른 학문들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생존을 유지할 것이다.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철학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물으며 자신의 시대적 상황에 맞게 계속 철학 활동을 해 나갈 것이다. 앞으로도 철학은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 철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역사적이고 고전적인 문헌들이 존재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철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많은 문헌들이 출판되고 있다.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글들이 읽히고, 쓰이고, 유통되고, 전파된다. 인지 능력과 언어 능력을 갖춘 나이 어린 사람들이 꾸준히 철학이라는 이름을 단 글들을 읽고, 쓰고, 이를 습득하여 내면화하고 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할 것 없이 철학의 역사는 대부분의 다른 학문들에 비해 오래되었다. 한때 철학은 만학의 여왕이었다가 지금은 그 지위가 많이 떨어졌지만, 그와 같은 세속적인 변화에는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법학과가 폐지되고 법학전문대학원이 개설된 이후, 철학 속 논리학 부분이 법학전문대학원 입학을 위해 필수적인 과목이 되었다. 철학에서의 논리적 추론 방식이 법학에서의 추론에 적합하다고 평가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철학적 사고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하나의 단순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철학의 위상은 부침을 거듭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철학이 여전히 살아 있고 사람들은 철학을 필요로한다는 사실이다.

 

   철학은 부와 명성을 바라지 않으며 주로 내적인 만족을 추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철학에 요구하는 책무를 회피하지 않는다. 철학을 전공한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사회인으로서 사회적 활동 과정에 나의 전공인 과학철학을 접목하고 있으며, 국내에 있는 여러 철학 학회들에 가입하여 학술 활동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나는 철학과 졸업생이자 과학철학 연구자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자 한다. 나라는 개인은 철학이라는 학문에 접속하여 내 삶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나는 내 삶을 위해 철학을 사용하며, 철학 역시 하나의 인간 개체인 나를 이용해 그 자신을 유지하고 번식한다.

 

   나는 철학에 걸려 있던 사회적 저주를 알면서도 철학을 선택했고, 지금껏 그 선택을 번번이 후회하면서도 결코 그러한 나의 선택을 최종적으로 철회하지 않았다. 이제 나는 한 사람의 기성세대로서 우리나라 철학 연구 전통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나는 철학을 사랑한다. 오래전부터 사랑해왔고, 지금 이 순간 사랑하며,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다. 나는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산다. 그리고 나는 인류가 생존하는 한 철학 또한 살아남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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